'철학'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0.06.13 코기토의 철학자 데카르트
  2. 2010.05.03 중세 교부철학의 시작
  3. 2010.05.03 스콜라철학의 완성
  4. 2010.05.03 이븐 루슈드(아베로에스) (2)

기독교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중세 철학을 만들고 발전시킨 것은 바로 이 둘이다. 이들 사이의 부조화를 발견하고 해결하여 조화롭게 만드는 것이 중세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목표’라는 것은 한 가지를 전제한다. 그것은 기독교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그 어떤 것도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중세 학자들에게 이 둘은 의심할 수 없고 거부할 수 없는 진리, 즉 도그마(dogma)였다.


그러나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기독교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확고부동한 지위는 점차 흔들리게 된다. 성경 해석에 있어 문제가 발생했을 때, 신학적 권위를 가지고 해결책을 제시했던 교황청은 루터 이후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 새롭게 알려지기 시작했던 다양한 그리스 철학자들의 글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독자적 지위를 위협했다. 다양한 그리스 철학자들의 글들로부터 우주와 인간에 대한 다른 생각들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런 생각들이 하나로 통일될 수 없다는 것도 점차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도그마의 위기! 이것이 15, 16세기 유럽의 지적인 분위기였다.

 

 

 

 

도그마의 위기는 회의주의(skepticism)를 낳는다. 여기서 회의주의란 절대적 진리, 의심할 수 없는 진리에 대한 회의를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지적 능력을 이용해 절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없으며, 나아가 절대적 진리가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인간의 감각 경험은 불완전하다. 자라를 보고 놀란 당신은 솥뚜껑을 보고 놀라기도 한다. 설사 당신이 그런 착각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감각 경험 그 자체는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당신은 지금 컴퓨터를 보고 있지만, 실제로 당신 앞에 컴퓨터가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다. 당신은 매트릭스 안에 갇혀 전기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는 감각적 자극을 받고 있을 수도 있다. 당신이 보고 있는 컴퓨터가 실제로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와 다르게 실제로 컴퓨터가 있는 것은 아니며 단지 매트릭스로부터 전달된 전기 신호를 받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렇듯 감각 경험만으로는 이 세계가 매트릭스의 세계인지 그렇지 않은지 결정할 수 없다. 파란 알약과 빨간 알약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감각 경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물론 이런 감각 경험에 대한 회의는 인간의 다른 지적 능력으로 확장될 수 있다.


몽테뉴(Montaigne, 1533~1592)는 대표적인 16세기 회의주의자다. 당시 새롭게 발견된 퓌론주의(Pyrrhonism)에 경도된 사상가들은 절대적 진리에 도달하기에는 인간의 지적 능력은 불완전하다고 강변한다. 이 회의주의자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회의주의는 극복할 필요가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우선, 회의주의는 극복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다양한 과학기술들을 유용하게 사용한다. 이런 유용한 과학기술들은 다양한 감각 경험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만약 감각 경험들을 신뢰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다양한 과학기술들을 신뢰할 수 없다. 따라서 철저한 회의주의자들은 과학기술들을 신뢰할 수 없으며, 따라서 과학기술의 유용성 같은 것도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은 문제다. 특히 과학혁명 이후의 철학자와 과학자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그들은 과학에 의해서 사회는 풍요로워지고 인류는 진보할 수 있으리라 믿었으며, 더 나아가 이것을 신이 그들에게 부여한 중요한 사명으로 여기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에게 지식의 확실성을 부정하는 회의주의는 당연히 극복해야할 장애물이었다.

서양 근대철학의 아버지, 르네 데카르트.

 

그럼 어떻게 회의주의를 극복할 것인가? 물론 다양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인간은 절대적 진리를 획득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개연적인 진리는 획득할 수 있다는 온건한 주장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런 주장은 회의주의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지식의 유용성을 설명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이와 달리 회의주의자들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방안은 없는가? 즉 인류가 절대적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거나, 혹은 그런 절대적 지식을 제시할 수 있는가? 이 일을 하려고 한 사람이 바로 데카르트이다. 그는 회의주의에 맞서, 인간 지성은 절대 확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여겼으며 그런 절대적 지식을 제시한다. 그의 목표는 이성을 사용하여 철학적 진리, 즉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데카르트는 1596년 프랑스의 투렌(Touraine)이라는 지역에서 태어났다. 성장한 이후 주로 네덜란드에서 활동했다. 말년에는 스웨덴에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철학을 존경하던 스웨덴 여왕의 초청 때문이었다. 결국 1650년 데카르트는 스웨덴의 추운 날씨를 견디지 못하고 숨을 거두게 된다. 데카르트는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근대 철학의 두 기둥이었던 합리론과 경험론 중에서 합리론의 핵심 인물이기도 하다. 더불어 그는 과학자이자 수학자였으며,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물론 그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고 말할 때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것과 분명히 다르다. 아퀴나스가 훌륭한 철학자이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신학자였다면, 데카르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과학자이자 철학자였다.

 

데카르트를 초청한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과 데카르트(맨 오른쪽).


이제 설명해보자. 그는 어떻게 철학적 진리에 도달했으며 그렇게 해서 도달한 철학적 진리는 무엇인가? 회의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데카르트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회의, 즉 의심이었다. 그는 회의주의자들의 의심을 끝까지 그리고 철저하게 밀고 나가고자 했다. 만약 그런 의심이 성공적이라면, 그런 의심의 끝에서 더 이상 의심될 수 없는 무언가가 발견되리라고 기대했다. 이런 의심의 방법을 철학자들은 방법적 회의라고 한다. 의심에 의심을 거듭한 끝에 결코 의심될 수 없는 것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럼 무엇을 의심하는가? 우리는 모든 개별적 지식들을 철저하고 완벽하게 의심할 수 있는가? 이런 의심은 끝나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의심스러운 개별적인 지식들은 그 수가 무척 많고 또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철저하고 완벽한 의심을 할 수 있는가? 한 가지 길은 그런 다양한 개별적 지식을 낳는 지적인 방법을 의심하는 것이다. 즉 다양한 지식을 낳는다고 여겨지는 지적인 방법들이 과연 확실한 진리를 보장하는지 검토하는 것이다. 그럼 우리의 지식은 어떤 방법을 통해서 획득되는가? 아마도 첫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감각 경험을 통한 지식의 획득이다. 나는 경험을 통해서 내 앞에 있는 노란색 지폐가 5만원권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런 감각 경험이라는 방법은 지식의 확실성을 보장하지 못한다. 우리는 착각했을 수 있다. 사실은 5천원권 지폐인데, 나의 기대와 희망이 5만원권 지폐로 착각하게 만든 것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데카르트는 감각 경험은 확실한 지식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또 다른 논변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꿈의 가설이다. 나는 어제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으며, 그 비행기 창문 너머로 해가 뜨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꿈 속에서도 무언가를 경험하고 무언가를 본다. 즉 감각 경험은 꿈 속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각 경험만으로는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태양이 실제로 있는 것인지, 단지 꿈 속에 있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즉 감각 경험은 우리에게 확실한 지식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꿈 속이든 꿈 밖이든 항상 성립하는 것도 있다. 가령, 2+3=5라는 것은 꿈이 아닌 세계에서도, 꿈에서도 참이다. 우리가 매트릭스 속에 갇혀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2+3=5이고, 삼각형은 세 개의 변을 가지며, 둥근 사각형은 불가능하다. 꿈에서도 이런 지식이 성립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러한 수학적 지식들을 획득하는 데 있어, 감각 경험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지식들은 감각 경험이 아니라 순수하게 정신적인 방법을 통해서 획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그 순수하게 정신적인 방법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납득할 만한 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성, 직관, 연역과 같은 다소 어려운 철학적 개념이 필요하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전반적인 의도를 이해하는 것만이 목표라면 굳이 그런 개념들을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순수하게 정신적인 방법을 통해 지식의 확실성이 보장되는지 여부다. 이 순간 데카르트는 다소 엉뚱한 상상을 덧붙인다. 그것은 유명한 ‘악마의 가설’이다. 전능한 악마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수학적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 즉 순수하게 정신적인 방법을 그 악마가 만들었다고 해보자. 더불어 악마는 그 순수하게 정신적인 방법을 통해서 지식을 획득할 때마다 인간이 실수를 저지르도록 장치를 해놓았다고 가정하자. 예를 들어 우리가 ‘2 더하기 3이 5’라는 것이 너무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악마가 만들어 놓은 속임수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런 악마가 존재할 수 있다면, 순수하게 정신적인 능력을 통해서 획득한 지식의 확실성 역시 충분하게 의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수학적 진리를 포함해서 가능한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 그런데, 의심에 의심을 계속하던 데카르트는 의심의 끄트머리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ego cogito, ergo sum)’라는 진리는 아주 확고하고 확실한 것이고, 회의론자들이 제기하는 가당치 않은 억측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것임을 주목하고서, 이것을 내가 찾고 있는 제일원리로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 [방법서설] 중에서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 하더라도, 꿈을 꾸고 있는 나는 존재한다. 내가 지금 매트릭스에 갇혀 있다고 하더라도, 매트릭스로부터 전기 자극을 받고 있는 나는 존재한다. 내가 지금 전능한 악마에서 철저히 속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속임을 당하는 나는 반드시 존재한다. 이런 의심을 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도, 의심을 하는 나는 존재한다. 나는 의심한다, 즉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보통 ‘코기토’라고 불리는 바로 이것이 회의주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데카르트가 찾아낸 절대 확실한 철학적 진리다. 그런데 코기토에 등장하는 ‘나’는 무엇인가? 방법적 회의를 통해 내가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르는 데 있어 나의 물질적인 부분, 즉 신체는 어떤 역할도 하지 못했다. 오로지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내가 존재한다는 결론에 영향을 주었을 뿐이다. 결국 코기토에 등장하는 ‘나’는 사유하는 무엇 혹은 정신적인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나의 정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금껏 살펴본 대로, 데카르트는 기독교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라는 두 도그마가 위기에 처한 시대에 새로운 도그마, 즉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절대적이고 의심할 수 없는 진리를 만들어 낸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철학은 신독단론(Neo-dogmatism)의 일종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의심의 끝에서 정신이 존재한다는 진리를 획득한 데카르트는 이제 다른 명징한 진리들을 찾아 나선다. 그 첫 시작은 신의 현존을 증명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물질적인 것의 현존을 증명하는 것이다. 방금 언급했듯이 정신적인 것의 존재는 물질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즉 정신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과 철저하게 구분되며, 그것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데카르트에게 있어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은 서로 독립적인 두 실체가 된다. 이런 점에서 일반적으로 데카르트의 철학은 이원론이라고 불린다. 정신적인 것의 본질은 사유이며, 물질적인 것의 본질은 연장이다. 어렵게 들리지만 간단하다. 정신적이라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며, 물질적이라는 것은 시공간 좌표의 어딘가를 점유한다는 말이다.

 

데카르트가 보기에 여러 동물들 중에서 우리 인간만이 이 두 가지 실체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은 사유를 할 수 있으며, 인간은 신체를 가지고도 있다. 이런 데카르트의 철학을 20세기 심리철학자인 길버트 라일(Gilbert Ryle, 1900~1976)은 ‘기계 속의 유령(the ghost in the machine)이라고 비꼬았다. 사실 데카르트의 이런 심신(心身) 이원론은 20세기 심리철학과 인지과학에 있어 극복해야 할 안티테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많은 심리철학 교과서들은 데카르트의 심신 이원론에서 시작하며, 그것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다양한 현대 철학 이론들을 소개한다.


데카르트의 심신 이원론의 문제점 중에서 하나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자. 그의 심리철학에 있어 중요한 것은 정신과 물질이 서로 독립적인 실체라는 것이다. 이 둘이 독립적인 실체라는 것은 어느 하나가 없어도 다른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가령 인간이 아닌 동물들은 정신이 없는 기계일 뿐이다. 천사나 신과 같은 것은 물질적인 것에 구속되지 않는 정신적인 것일 테다. 암튼 이 둘은 서로 구분될 뿐만 아니라, 존재하기 위해서 서로에게 의존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일견 우리의 경험과 잘 맞지 않는 듯이 보인다. 당신의 신체는 당연히 당신의 마음에 영향을 준다. 가령, 당신의 신체 중 일부가 불에 데었다고 생각해보자. 그럼 그 신체의 변화가 당신의 마음에 어떤 고통을 야기한다. 그리고 그 고통에 대해서 당신은 생각하고 되도록 그것을 피하려고 마음먹을 것이다. 반대 방향도 역시 성립한다.

데카르트의 주요 저작인 [방법서설]의 표지.

 

당신의 마음은 당신의 신체에 영향을 준다. 손을 올리고자 하는 당신의 의도(정신적인 것)는 당신의 손이 올라가는 것(물질적인 것)에 영향을 준다. 이렇게 몸과 마음은 서로 인과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서로 독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철학에서는 이런 인과적 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 그에게 있어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은 서로 독립적인 실체이기 때문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없다. 이 문제는 보통 심신 문제(mind-body problem)라고 불린다. 물론 이것은 데카르트 철학 특유의 문제만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심리철학 이론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등장했지만 여전히 문젯거리로 남아있다.

 

 

 

 

  1. 퓌론주의

    기원전 1세기경에 만들어진 학설이며, 이것의 존재는 섹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에 의해서 기록되어 알려졌다. 기원전 3세기 말 경에 살았던 퓌론(Pyrrho)의 이름을 딴 것이다. 퓌론주의에 따르면 진리라고 생각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설령 그런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것이 진리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2. 심리철학

    마음에 대한 연구를 하는 철학의 한 분야다. 최근 뇌과학, 인지심리학 등의 발전과 더불어 가장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다.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을 주장하는 현대 철학자의 수는 그리 많지 않으며, 대부분이 심신일원론을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심신일원론도 행동주의, 심신동일론, 기능주의 등으로 다양하다.

 

 

 

박일호 / 경희대 포스트 닥터 연구원
대학에서 건축공학, 대학원에서는 과학철학을 전공했다. 고려대학교에서 확률과 인식론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몇 가지 교양 과학책을 번역했으며, 논리학과 분석철학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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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ofly

노략질을 일삼던 해적이 알렉산더 대왕에게 잡혀왔다. 대왕이 꾸짖었다. “너는 도대체 왜 사람들을 괴롭히는가?” 해적이 거침없이 대꾸했다. “폐하가 사람들을 괴롭히는 이유와 같습니다. 단지 저는 배 한 척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해적이라 부르고, 폐하는 큰 함대를 거느리고 일을 하기 때문에 황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신의 나라 De civitate Dei] 4권에 등장하는 예화다. 그는 여기서 전쟁을 통한 제국의 확장이 해적의 강탈행위와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묻는다. 그리고 명쾌하게 결론을 내린다. 정의가 없는 국가는 해적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예화를 키케로가 쓴 [공화국]에서 빌어왔다(키케로의 기록은 실전되었다).


서양 고대사를 들여다보면 큰 위기가 세 차례쯤 있었다. 그 때마다 당대 최고의 지성이 그 위기에 대한 철학적 진단을 내렸다. 기원전 4세기 고대 그리스에서 도시 국가가 심각하게 부패했을 때 내려진 처방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국가]다. 그로부터 4백 년쯤 뒤 로마 공화정이 붕괴했을 때 키케로는 [공화국]을 집필했다. 또 다시 4백 년이 흘러 로마 제국이 무너지는 시점에서 나온 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22권의 대작 [신의 나라]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책을 쓴 결정적 계기는 410년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족에 의해 로마가 점령된 사건이었다. 그때까지 7백 년 동안 로마는 단 한 차례도 적군에 점령된 적이 없었다. 그런 위대한 로마가 야만족에 의해서 맥없이 짓밟힌 것이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역사의 스펙트럼을 넓혀서 해석하면, 이 사건은 유럽을 호령했던 로마의 영광이 꺾이는 결정적 사건이자, 머지 않아 한 시대의 막이 내릴 것이라는 징후이기도 했다. 종이 호랑이로 전락한 로마는 그 후 게르만족의 계속적인 침공을 받아 476년 마침내 역사 무대에서 사라진다. 역사가들은 로마 멸망을 기점으로 유럽에서 고대가 끝나고, 중세가 시작한다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을 읽기 위해서 우리는 세 개의 좌표를 그린다. 첫 번째는 시간 좌표다. 그는 고대의 끝 자락에 위치한 마지막 고대 철학자이며, 동시에 중세의 첫 대목에 등장하는 최초의 중세 철학자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공간 좌표다. 그는 제정 로마 시대의 라틴 교부에서 활동했지만, 그가 주로 활동한 것은 유럽이 아니라 북아프리카였다. 그는 지금의 알제리에 있는 히포 레기우스의 주교로 34년 동안 봉직했다. 그를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 당시 히포는 북아프리카에서 카르타고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고대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놓고 한때 로마와 자웅을 겨루었던 카르타고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수사학을 공부했으며, 로마에서는 수사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적으로는 고대와 중세의 경계지대에 위치해 있고, 공간적으로는 유럽과 아프리카를 넘나들었다.

 

세 번째는 우리가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하는 철학 좌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 그리스 철학과 원시 기독교를 접목한 인물이다. 그는 서양 사상의 원형을 이루는 두 개의 전통, 곧 그리스 철학에 배경을 둔 헬레니즘 전통과 기독교 종교에 배경을 둔 헤브라이즘 전통을 하나로 묶어 기독교철학 또는 신학을 출범시켰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계시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플라톤 철학의 옷을 입혔다. 그는 교부철학을 정립한 중세 초기의 최대 철학자, 또는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잠깐! 기독교는 철학이 아니지 않은가? 종교란 추상적인 이론체계가 될 수도 없고, 또 굳이 이론체계로 만들 필요도 없지 않은가? 중세철학의 권위이며 성공회 신부이기도 한 코플스톤은 기독교는 하나의 계시 종교로 세상에 나타났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는 원시 기독교의 기본 과제는 기독교를 하나의 철학 체계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고 세상을 회개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의 말씀은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준다. 그러나 선후관계로 보면 기독교도는 예수의 말씀이 이치에 맞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기 때문에 그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반면 철학은 항상 이치를 따진다. 이치에 맞으면 받아들이고, 이치에 맞지 않으면 내친다. 그것이 바로 철학의 기본 속성이다. 바로 이 교차 지점에 믿음(fides)과 이성(ratio) 사이의 긴장 관계가 숨어있다. 그러면 믿음과 이성은 대립과 충돌의 관계인가, 아니면 균형과 조화의 관계인가? 서양 사상의 지적 전통은 양자의 관계를 후자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1998년 로마 가톨릭 교황 바오로 2세가 발표한 “믿음과 이성은 인간 정신이 진리를 바라보면서 날아오르는 두 날개”라는 [신앙과 이성의 회칙]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종교는 이성과 배치되지 않고, 오히려 이성을 요청한다는 메시지다. 믿음은 광기와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함께 날아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과 이성이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두 날개라는 견해는 중세 후기에 등장하는 스콜라 철학에서 공고화되지만, 믿음과 이성의 균형을 중시하는 것은 기독교 신학의 토대를 세운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이미 강조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로 귀의하기까지의 정신 편력은 그가 쓴 [고백록]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은 서양 자서전 문학의 효시로서, 어린 시절의 부끄러운 기억과 젊은 날의 방황에 대한 고백을 기도문 형식으로 담고 있다. 팔딱팔딱 튀는 문학적 감수성이 담긴 글을 읽는 맛도 좋지만, 당대 최고의 지성이 그리는 고대 지중해 세계의 지적 풍토를 읽는 맛도 쏠쏠하다. 어린 시절 한번쯤은 해봤음직한 과일 서리를 두고 “과일이 탐이 나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친구와 과일을 훔치는 행위를 사랑했기 때문에 한 것이다”라고 표현한 대목에서는 심리 묘사가 뛰어난 한 편의 소설을 읽는다.  [고백록]이 오랜 시간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의 근원을 선의 결핍에서 찾는다. 악을 신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죄를 범하는 인간 의지의 나약함에서 찾았다.

 

그래서 이웃집 과수원에서 과일을 따먹는 일과 같은 어린 시절의 장난까지도 악의 증거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이런 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우구스티누스의 답은 미약한 인간은 혼자 힘으로 이 악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고, 인간을 도와주는 신의 전능한 의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인간을 구원하는 신의 의지 –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신의 ‘은총’이라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를 체계적인 논리로 정립한다. 아마도 원시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체계적 교리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성령으로 태어난 인간이었는지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왜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이 서로 다른 위격을 가지면서도 하나가 될 수 있는지 삼위일체에 관한 질문을 던질 필요도 없고, 그에 대한 답을 할 필요도 굳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발전하면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로부터 기독교를 지키기 위해서, 또 신학 이론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논리를 발전시켜야 할 필요성이 점차 커졌다. 기독교의 진리를 지적으로 변호하는 변증론(apologetics)이 신학의 주요 분야로 떠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에 플라톤 철학의 옷을 입혔다. 플라톤은 인간은 진리를 보지 못하는 쇠사슬에 묶인 동굴 속의 죄수와 같다고 했다. 지성(nous)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육안의 눈으로만 보는 것은 한갓 그림자에 불과하고, 그 그림자를 만드는 진짜 세계는 우리가 갇힌 동굴 속 너머 저편에 있다고 했다. 플라톤이 말하는 진짜로 실재하는 세계, 곧 이데아의 세계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서 신의 세계가 되었다. 플라톤은 우리가 사는 세계는 현상 세계라고 했다. 우리는 현상 세계에 있는 것들을 감각을 통해서 보고 듣고 만지면서 그것이 진짜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이데아의 모사에 불과한 가짜라고 했다. 정말 실재하는 것, 곧 이데아는 현상 세계에서는 망각되었다고 했다. 플라톤은 몸과 감각에 묶여 망각된 사실을 다시 기억해내는 것을 철학의 사명으로 삼았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와서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은 신의 개념이 되었다. 신은 완전한 실재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곧 플라톤이 말하는 현상 세계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와서는 불완전한 실재가 되었다. 그 사이에 위치한 인간은 한편으로는 영혼을 가진 완전한 실재이면서 동시에 육체를 가진 불완전한 실재가 된다. 플라톤은 참된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이성의 지도를 받은 절제와 조화를 강조했다. 플라톤은 그러한 자기 절제를 통해서 이데아를 기억해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 참된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은 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완전한 실재인 신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를 기억해 낸다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완전한 실재인 신을 기억해내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적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철학이라는 옷을 입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살았던 시대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허용되고, 또 마침내 로마제국의 공식 국교가 되는 시기였다. 제국이 공인한 유일무이한 종교로서 기독교가 가진 당면한 과제는 어떻게 기독교를 로마인에게 이치에 맞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은 이 물음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나라]에서 신을 멀리 하는 나라를 하나의 강도 집단으로 봤다. 그것은 신을 멀리 하려는 인간의 교만의 결과이다. 이러한 교만한 자의 공동체가 아닌, 겸손하게 신의 은총에 의한 구원을 고대하는 공동체가 바로 신의 나라다.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신의 나라는 기독교 공동체 곧 교회를 말한다.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제국이 사라진 이후에도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론체계(교의)를 구축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에 필요한 제도로서의 교회이론을 세운 ‘교회의 아버지’(교부)였다. 그가 세운 이론을 교부철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정재영 / 철학자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2,30대에 언론사 기자를 지냈다. 나이 40에 늦깎이 유학생으로 영국에 건너가 워릭대에서 사회 존재와 인간의 이해에 대한 리얼리즘 접근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기도 양평에 있는 대부산 중턱에 자리를 잡고 철학 저술 작업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 1, 2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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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기는 게르만 민족의 이동으로부터 시작된다. 게르만 민족의 이동으로 시작된 유럽 민족의 대이동은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접촉을 야기했다. 그 결과 진취적인 유목민족이 가지고 있던 목축에 관한 기술과 도구가 농경민족에게 전해지면서 농업의 혁신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농업의 혁신은 풍족한 농업 생산물을 가질 수 있게 하여 중세기의 생산관계인 봉건제도를 빠르게 정착시켰고, 사회에는 잉여 생산물이 축적되었다. 중세기 농업 혁신으로 인한 잉여 생산물의 축적은 사회에 경제적인 여유를 제공하였고, 이는 12세기 이후 중세기의 대학 설립의 기초가 되었다.

 

 

 

 

스콜라 철학은 대학의 설립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중세기 초 교부철학은 교부(敎父), 즉 성직자들에 의한 철학으로, 비교적 초월주의적인 성격이 강한 기독교 철학이다. 대학의 등장은 교부철학이 스콜라 철학으로 대체되는 계기가 되었다. 스콜라 철학은 학자(스콜라)에 의한 철학으로, 그리스 철학(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결합하여 성립된 철학 체계이다. 따라서 스콜라 철학은 교부철학에 비해서 합리주의적 가치가 강조되는 기독교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스콜라 철학도 여전히 초월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면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스콜라 철학자들은 신이 인간의 삶에 개입하는 일반적인 방식은 합리적인 자연법칙을 통해서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대학의 등장은 중세기를 기독교의 초월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정신과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정신이 공존하는 시대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그 중심에 스콜라 철학이 있고, 스콜라 철학의 정점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1224년(혹은 1226년) 이탈리아의 나폴리 근교에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 나폴리 대학에서 수학하고, 1245년 파리 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 곳에서 당시 대학자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를 만나는데, 그와 함께 몇 해 동안 쾰른에서 연구 생활을 한 것을 제외하면 거의 10 년 여를 파리 대학에서 보낸다. 그런데 당시의 파리 대학은 신앙과 이성의 갈등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1215년 로마 교황청은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를 금지하고, 1231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담긴 오류를 시정하도록 권고한 위원회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1250년 경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강의금지령이 해제된 후에도, 신앙과 이성에 대한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중세기 철학자들을 논쟁의 소용돌이에 빠뜨린 중요한 두 개의 주제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신앙과 이성의 긴장에 관한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보편자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서는 첫 번째 문제에 대한 아퀴나스의 입장을 살펴보면서, 13세기 중세기 스콜라 철학, 혹은 스콜라 신학에 대해 이해해 보기로 하자.

섬네일 이미지

14세기 이탈리아 화가가 그린 토마스 아퀴나스의 벽화(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 내부).

 

 

 

 

신앙과 이성의 긴장에 대한 중세 철학자들의 입장은 매우 다양했다. 즉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말한 터툴리안과 같이 극단적으로 신앙을 우위에 둔 입장에서부터, 보에티우스처럼 계시적 진리를 받아들이지만 철학의 합리적 진리를 여전히 강조하는 입장까지 매우 다양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랍의 철학자, 아베로에스(Averroes)의 영향을 받은 일군의 신학자들은 신앙의 진리와 이성의 진리는 별개의 것이고, 따라서 진리는 두 개라는 이중 진리론(double-truth theory)을 통해서 그러한 갈등을 해소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퀴나스가 보기에, 이중 진리론은 하나의 현상에 대한 신앙적 관점에서의 진리와 이성적 관점에서의 진리가 서로 충돌할 때도 여전히 둘 다 받아들일 수 있다는 모순적인 주장을 한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운 해결이 아니었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신이 특별한 은총으로 부여한 계시적
진리와 신이 부여한 이성에 근거한 이성적 진리는
모순적이지 않다.


아퀴나스는 신학과 철학은 구별되지만, 그 둘이 결코 모순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의 이성에는 고유의 법칙이 있고, 그것을 통해서 신의 개입 없이도 진리를 인식할 수 있고, 따라서 신앙으로 계시된 진리만이 유일한 진리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인간에게는 두 가지 인식 방법과 인식 영역이 있고, 그런 이유 때문에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것과 신의 계시에 의한 인식이 있다. 그리고 그 두 영역은 분명하게 구별되는 것이고, 따라서 경험을 통해서 이성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영역을 다루는 철학과 초자연적인 계시의 진리 영역을 다루는 신학은 구별된다. 그러나 이성의 법칙에 따라 인식된 진리와 계시를 통해서 얻게 된 진리는 서로 보충적일 수는 있지만 결코 모순적이지는 않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철학적 진리와 신학적 진리가 모순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퀴나스에 따르면, 인간의 철학적 진리는 인간이 신에 의해서 창조될 때 부여 받은 이성에 의해서 그 정당성을 갖게 된다. 이성적 진리는 신이 부여한 이성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결코 신이 특별한 은총으로 부여하는 계시적 진리와 충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앙과 이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교부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은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고, 아퀴나스의 입장은 ‘믿기 위해서 이해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이 지식의 토대이며, 이성적 지식보다는 신앙이 우선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믿기 위해서 이해한다’라고 표현된 아퀴나스의 입장을 이성이 신앙을 위한 토대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그의 말은 신앙의 영역과 이성의 영역은 서로 보완적이고, 자연적 이성을 통해서 신앙으로 나갈 수 있다는 합리적 신앙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아퀴나스도 이성에 의한 지식을 신앙(계시)에 의한 지식보다는 낮은 단계의 것으로 보았고, 이성적 사고와 신앙적 사고가 함께 할 때 세계에 대한 완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기독교적 사유 틀 내에 있었던 것이다.

 

 

 

 

교부철학이 플라톤, 정확히 말해서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면, 스콜라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중세기 신학자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중요한 부분이 기독교의 교리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은 본성상 지금의 모습대로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거기에는 변하지 않는 규칙이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입장을 받아들이면, 신의 개입으로 발생하는 기적을 인정할 수도 없었고, 우주를 신의 피조물로 여기기도 어렵다. 또한 당시 기독교 사상은 플라톤의 영향을 받아, 현실 세계에 대한 연구를 성서 연구에 부수적인 것 이상으로 간주하지 않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경험적인 현실 세계에 대한 탐구로부터 시작되고 그러한 탐구는 그 자체로 중요한 가치를 갖는 것으로 인정한다. 그렇다면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어떻게 기독교 신학과 화해시켜 기독교화 할 수 있었을까?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물려받은 가장 중요한 유산은 경험세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과 목적론적 세계관이다. 경험적이고 현실적인 것에 주목한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아퀴나스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에서 출발해야 함을 배웠다.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참된 지식은 신이 인간에게 빛을 비추어서 알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를 “신의 조명설”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신의 직접적인 개입 없이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감각적 대상으로서의 자연물도 실재로 간주하고, 경험과 인간 이성을 통해서 그러한 실재에 대한 지식을 탐구하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경험을 중요시한 점은 아퀴나스의 신의 존재 증명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아퀴나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신은 인간의 정신에 자명하게 드러난다는 이른바 선험적인 증명을 시도했지만, 아퀴나스는 신의 존재가 인간의 감각적 경험을 토대로 한 증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인식된다고 설명함으로써, 경험적 신 존재 증명을 제시한다.

아퀴나스는 완전하고 궁극적인 지식은 신을 아는 지식이고, 그것이 바로 인간의 궁극의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바로 목적론적 사상이다. 이 점은 특히 그의 윤리학에서 잘 나타난다. 목적론에 따르면, 인간의 행위는 물론 인간 존재 자체에도 목적이 있다. 인간에게 존재의 목적이 있듯이, 인간을 구성하는 모든 기관에도 목적이 있다. 예컨대 눈은 보기 위해 존재하고, 귀는 듣기 위해 존재한다. 즉 눈은 ‘보기 위함’이라는 목적을, 귀는 ‘듣기 위함’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자신에게 부여된 목적을 잘 실행할 때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존재 상태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그 존재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행위 할 때 도덕적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신체의 일부를 그 존재 목적에 어긋나게 사용한다면, 그 행위는 자연스럽지 못하고, 부도덕하다. 중세기 기독교가 성윤리에서 특별히 자위나 동성애를 어떤 성적인 부도덕보다 강한 비난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인간의 성 행위의 목적과 성기관의 존재 목적을 생식이라고 보았던 기독교 윤리에 따르면, 생식이라는 존재 목적에서 벗어난 행위들은 자연스럽지 않은, 부도덕한 행위로 여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받아들이면서, 인간의 궁극의 목적이 행복이라는 데도 동의한다. 즉 행복이 인간이 추구해야 할, 인간의 궁극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행복 그 자체는 절대적인 것이어야 하고, 영원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신을 아는 지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철학적 사유, 관조적 삶에서 행복을 찾은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답게 완전하고 궁극적인 지식은 신을 아는 지식이고, 그것이 바로 인간의 궁극의 행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아퀴나스가 스콜라 철학이라는 거대한 신전을 완성하는 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라는 재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그 철학자’라고 칭한 것처럼, 아우구스티누스를 ‘그 신학자’라고 칭했다. 다시 말해서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철학자라고 하면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였던 것처럼, 신학자라고 하면 아우구스티누스, 단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스콜라 철학이라는 거대한 신전을 건축하기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재료는 아우구스티누스인 셈이다. 물론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많은 점에서 다르다. 그러나 아퀴나스가 그의 대표적인 저서 중 하나인 [이방인 대전]의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의 과제는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신에 대한 책임 있는 이야기”로서 신학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아퀴나스가 아우구스티누스와 달리 신앙의 영역과 이성의 영역을 구분했지만, 신앙의 영역으로서의 신학에 초월적인 계시와 기독교 구원의 신비주의적 영역을 남겨둔 것은 플라톤주의적이며, 아우구스티누스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철학자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가 아니었지만, 신학자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였다고 평가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결국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누스라는 눈을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수용함으로써 스콜라 철학이라는 거대한 신전을 완성한 셈이다.

 

아퀴나스는 1272년, 나폴리 대학으로 돌아가서 연구와 강의를 계속하다가, 1273년 일종의 무아지경의 깨달음을 체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내가 이제껏 쓴 것들은, 내가 보았고 나에게 계시된 것에 비한다면 한낱 지푸라기처럼 느껴졌다.”고 말하고, 강의와 저술 활동을 중지했다고 한다. 50년이라는 길지 않은 삶을 오직 연구와 저술, 그리고 대학에서의 강의로 보낸 아퀴나스.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를 보내면서도 절대자인 신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신에 대한 지적인 여정을 멈추지 않은 아퀴나스. 그는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종교와 이성 사이의 올바른 관계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촉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송하석 / 아주대 철학 교수
불어불문학을 공부하다 철학에 관심을 갖고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학교에서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클레어몬트 대학에서 진리론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언어철학, 심리철학, 논리학에 관한 여러 논문을 발표하였고, 우리 사회가 논리적인 사회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리더를 위한 논리훈련]을 출간하였다. 지금은 아주대학교 기초교육대학에서 철학과 논리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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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븐 루슈드를 아는가?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라파엘로가 바티칸 궁에 그린 [아테네 학당]에는 터번을 쓴 인물이 등장한다. 이 사람이 바로 이븐 루슈드다. [아테네 학당]에 나오는 유일한 이슬람 학자로, 유럽에서는 아베로에스(Averroes)라는 라틴어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단테가 쓴 [신곡]에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철학자들과 함께 ‘림보’(기독교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이들이 가는 곳)로 간 인물로 나온다. 이슬람 철학자가 왜 로마 바티칸 궁 벽화에 그려졌을까? 그는 아랍어로 기록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라틴어와 히브리어로 번역해서 유럽에 전한 사람이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26년간 이 작업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책에는 간단한 약론에서 자세한 상론까지 세 종류로 나누어 주석을 달았다. 만약 루슈드의 작업이 없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유럽에 알려지지도 않았고, 기독교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옷을 입힌 중세 스콜라 철학이 탄생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스콜라 철학에서는 이름 대신 ‘철학자’라는 보통명사로 통용되는 이가 있다. 이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리킨다. ‘철학자’와 함께 ‘주석자’라는 호칭으로 거명되는 이도 있다. 이 주석자는 루슈드를 지칭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아무리 생각해도 통상적인 표기 방식은 아니다. 처음 ‘철학자’와 ‘주석자’가 중세 유럽에 등장할 때 그들은 모두 이슬람 세계에서 건너 온 수상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철학자가 그 혐의를 벗은 뒤에도 주석자는 철학자를 오독한 인물로 인용되었다. 주석자는 위대한 철학자를 오염시킨 간사한 이교도였을 뿐이었다.

 

나는 이것을 ‘루슈드 두들겨 패기’라고 부르고 싶다. 체제에 위협이 된다고 여겨지는 인물, 또는 사상이 소개될 때 종종 나타나는 양상이다. 위험한 철학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감추다가, 더 이상 덮을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속죄양을 만들어서 두들겨 패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때로는 집단 광기가 동원된다. 한 마디로 마녀 사냥이다. 잠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그토록 위험한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상식을 존중하고 중용의 덕을 유난히 강조한 철학자가 아닌가? 상식과 중용의 철학자로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소개한 이븐 루슈드를 위험한 인물로 두들겨 패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의문은 또 있다. 플라톤과 더불어 서양철학의 전통을 세운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떻게 이븐 루슈드에 의해서 유럽에 전해졌다는 말인가?


이 퍼즐을 풀기 위해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기독교 유럽 세계에서 실전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중세 초기 유럽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논리학에 대한 단편적 기록 이외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가 <철학의 숲> 아우구스티누스 편에서 본 바와 같이 중세 초기의 철학은 기독교에 플라톤 철학을 결합한 교부 철학이 성행했다. 그러면 도대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어디에서 갑자기 나타났다는 말인가? 그것은 이슬람 세계에서 건너왔다. 기독교 유럽에서 실전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이슬람 세계에서 계승 발전되고 있었던 것이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 터번을 쓴 모습으로 그려진루슈드(아베로에스). [아테네 학당]에 등장하는 유일한 이슬람 학자다.

 

 

 

 

14세기 이탈리아 화가가 그린 이븐 루슈드(아베로에스)의 모습


흔히 중세를 암흑 시대라고 부른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물 페트라르카가 처음 쓴 암흑 시대라는 표현은 중세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런가? 로마 제국, 더 정확하게 말하면 로마를 수도로 하는 서로마제국이 무너진 뒤 지중해 세계의 질서는 크게 재편된다. 이슬람 세력은 북부 아프리카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까지 세력을 넓혀나간다. 지금 우리가 유럽이라고 부르는 지역은 이슬람 제국에 의해 포위되어 있는 형국이다. 이 시기를 유럽에서는 암흑 시대라고 부르지만, 이슬람에서는 황금 시대라고 부른다. 물리적인 힘에서도 이슬람이 유럽보다 컸지만, 문화의 힘에서도 이슬람이 유럽을 압도하는 시기였다. 역사가는 이 때를 ‘이슬람의 황금시대’(750~1258)라고 부른다.

 

이븐 루슈드는 1126년 에스파냐 코르도바에서 태어났다. 근대 이전의 대부분 학자처럼 그는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당대 최고의 이슬람 학자들이 그렇듯이 그는 칼리프(이슬람 교단의 최고 지도자) 가족의 건강을 책임지는 궁정의사이기도 했다. 철학과 과학, 그리고 의학 분야에 남긴 그의 업적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근대 의학이 출범한 곳으로 이름이 높은 이탈리아 파도바 대학의 의학부 교수들은 대부분 루슈드의 제자들이다. 기독교 세력에 의해 코르도바에서 쫓겨난 그의 제자들이 무더기로 베네치아 근처에 있는 파도바 대학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의학 분야에 관한 한, 당시 기독교 유럽의 학문 수준은 이슬람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과학 분야에서도 그의 공헌은 크다. 과학사라는 학문을 개척한 20세기 과학사가 조지 사튼에 따르면 이븐 루슈드와 그의 주장을 따르는 아베로이즘(Averroism)은 16세기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철학과 과학이 분리되지 않았던 근대 이전의 시기에 과학의 역사는 곧 철학의 역사이기도 하다. 사튼은 마녀 사냥을 당했던 이슬람 학자 이븐 루슈드의 명예 회복과 역사에서 지워진 아베로이즘 4백 년의 역사를 다시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븐 루슈드가 주창한 학문이 고대 학문에서 근대 학문으로 넘어가는 진정한 이행 과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사튼은 말한다. 이 말에 동의한다. 루슈드가 잃어버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찾아 주었듯이, 우리도 루슈드 철학의 제 자리를 찾아주어야 한다. 

 

철학의 눈으로 본 이븐 루슈드는 이성을 중시한 합리주의자다. 그것은 이슬람 교리에 반대하는 철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한 알 가잘리의 [철학자의 모순]을 재반박한 이븐 루슈드의 [모순의 모순]에서 잘 드러난다. 가잘리와 루슈드가 제기한 물음은 신학과 철학이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이 질문을 살짝 돌려서 말한다면 신앙과 이성은 서로 화합 가능한가 하는 물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잘리가 철학에 대한 신학의 우위, 또는 이성에 대한 신앙의 우위를 주장했다면, 루슈드는 가잘리의 주장에 대한 이의제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신학이란 이슬람 성전인 [쿠란]에 대한 해석과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을 기록한 [순나]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하디스]에서 기초한 이슬람 신학이며, 철학이란 고대 그리스 철학 원전에 대한 번역과 주해를 기초로 하는 철학 연구를 말한다. 루슈드는 이슬람 율법이 철학 연구를 결코 금하지 않으며, 오히려 율법은 논증적 추론을 하는 철학 연구를 명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루슈드는 철학과 신학의 조화를 변호하는 것을 뛰어 넘어서 철학이야말로 진리의 최종 중재자라고까지 주장한다. 신앙에 대한 이성의 우위로 해석될 수 있는 이 주장은 후에 그가 이단으로 단죄되는 하나의 원인이 된다. 그는 율법학자들이 주도하는 철학에 대한 박해가 본격화되었을 때 코르도바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 루세나에 감금되었고 그가 쓴 책들은 불태워졌다. 그의 나이 70이 되는 만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듬해 그는 감금에서 풀려났지만, 모로코에서 생을 마감했다.

블랙 아리스토텔레스. 이슬람 세계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검은 피부를 가진 흑인으로 그려진다.

 

 

 

 

눈을 다시 유럽 세계로 돌리면, 루슈드는 오늘의 서구사상의 전통을 이어준 사람이다. 그는 서구 사상의 큰 흐름을 이루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발굴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중세 유럽에 전달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서구 사상의 큰 특징으로 자리잡은 합리주의 전통을 이어준 인물이다. 그 점에서 기독교 유럽 세계는 루슈드에게 큰 빚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 빚을 갚기는커녕 두들겨 팬 죄가 있다. 유럽의 눈으로 정리한 지적 풍토에서 루슈드는 때로는 이름 없는 적으로, 때로는 기독교 세계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서 침투시킨 ‘사상 전사’ 쯤으로 등장한다. 그러한 흔적은 루슈드를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평가에서 절정을 이룬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베노초 고촐리(Benozzo Gozzoli)가 그린 [아베로에스에 대한 아퀴나스의 승리](부분).

 

 

 

 

정재영 / 철학자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2,30대에 언론사 기자를 지냈다. 나이 40에 늦깎이 유학생으로 영국에 건너가 워릭대에서 사회 존재와 인간의 이해에 대한 리얼리즘 접근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기도 양평에 있는 대부산 중턱에 자리를 잡고 철학 저술 작업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 1, 2권이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고촐리가 그린 그림 [아베로에스에 대한 아퀴나스의 승리]는 스콜라 철학의 왕으로 칭송되는 아퀴나스와 그의 발 밑에 납작 꿇어 엎드린 루슈드를 대조시키고 있다. 과연 루슈드와 아퀴나스는 그런 사이인가? 그들은 이슬람 세계와 기독교 세계를 각각 대표해서 서로 싸운 사이인가? 아니다. 이건 집단 광기가 빚어낸 창작이다. 루슈드는 이슬람 세계에서 박해를 받은 일종의 반체제 인사이며, 아퀴나스는 그 당시 수상쩍게 생각한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그 철학자를 소개한 주석자 루슈드를 적극 받아들여 방대한 신학체계로 녹여낸 인물이다.

 

유럽 출신인 과학사가 조지 사튼은 유럽 세계가 이슬람 세계에게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 심정으로 이슬람 학자들을 만나 역사의 조각을 맞추었다고 한다. 그렇다. 이것이 역사의 제 자리를 찾는 첫 걸음인지도 모른다.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해서 분명하게 밝혀 두자면, 나는 여기에서 이슬람 철학이 기독교 철학보다 낫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 역도 아니다. 소통이 막힐 때 벌어지는 대결구도의 위험성을 고발하는 것이다.


루슈드는 소통의 길을 연 철학자지만, 닫힌 소통 구조에서 큰 피해를 본 철학자였다. 나는 루슈드를 통해 소통 공간이 막힐 때 나타나는 집단 광기를 읽는다. 루슈드가 아닌 아베로에스는 기독교 유럽을 위협하는 인물의 이름이었고, 아베로에스가 아닌 루슈드는 이슬람을 흔드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불행하게도 그는 이슬람 세계에서도 결코 환영받는 인물이 아니었다. 역사의 아이러니지만, 그의 철학은 이슬람 세계가 아닌 기독교 세계에 오히려 더 큰 영향을 끼쳤다. 과연 그는 어떤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되기를 원할까? 이슬람의 이븐 루슈드일까, 아니면 유럽의 아베로에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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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of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