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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5.03 중세 교부철학의 시작
  2. 2010.05.03 스콜라철학의 완성

노략질을 일삼던 해적이 알렉산더 대왕에게 잡혀왔다. 대왕이 꾸짖었다. “너는 도대체 왜 사람들을 괴롭히는가?” 해적이 거침없이 대꾸했다. “폐하가 사람들을 괴롭히는 이유와 같습니다. 단지 저는 배 한 척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해적이라 부르고, 폐하는 큰 함대를 거느리고 일을 하기 때문에 황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신의 나라 De civitate Dei] 4권에 등장하는 예화다. 그는 여기서 전쟁을 통한 제국의 확장이 해적의 강탈행위와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묻는다. 그리고 명쾌하게 결론을 내린다. 정의가 없는 국가는 해적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예화를 키케로가 쓴 [공화국]에서 빌어왔다(키케로의 기록은 실전되었다).


서양 고대사를 들여다보면 큰 위기가 세 차례쯤 있었다. 그 때마다 당대 최고의 지성이 그 위기에 대한 철학적 진단을 내렸다. 기원전 4세기 고대 그리스에서 도시 국가가 심각하게 부패했을 때 내려진 처방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국가]다. 그로부터 4백 년쯤 뒤 로마 공화정이 붕괴했을 때 키케로는 [공화국]을 집필했다. 또 다시 4백 년이 흘러 로마 제국이 무너지는 시점에서 나온 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22권의 대작 [신의 나라]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책을 쓴 결정적 계기는 410년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족에 의해 로마가 점령된 사건이었다. 그때까지 7백 년 동안 로마는 단 한 차례도 적군에 점령된 적이 없었다. 그런 위대한 로마가 야만족에 의해서 맥없이 짓밟힌 것이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역사의 스펙트럼을 넓혀서 해석하면, 이 사건은 유럽을 호령했던 로마의 영광이 꺾이는 결정적 사건이자, 머지 않아 한 시대의 막이 내릴 것이라는 징후이기도 했다. 종이 호랑이로 전락한 로마는 그 후 게르만족의 계속적인 침공을 받아 476년 마침내 역사 무대에서 사라진다. 역사가들은 로마 멸망을 기점으로 유럽에서 고대가 끝나고, 중세가 시작한다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을 읽기 위해서 우리는 세 개의 좌표를 그린다. 첫 번째는 시간 좌표다. 그는 고대의 끝 자락에 위치한 마지막 고대 철학자이며, 동시에 중세의 첫 대목에 등장하는 최초의 중세 철학자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공간 좌표다. 그는 제정 로마 시대의 라틴 교부에서 활동했지만, 그가 주로 활동한 것은 유럽이 아니라 북아프리카였다. 그는 지금의 알제리에 있는 히포 레기우스의 주교로 34년 동안 봉직했다. 그를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 당시 히포는 북아프리카에서 카르타고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고대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놓고 한때 로마와 자웅을 겨루었던 카르타고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수사학을 공부했으며, 로마에서는 수사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적으로는 고대와 중세의 경계지대에 위치해 있고, 공간적으로는 유럽과 아프리카를 넘나들었다.

 

세 번째는 우리가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하는 철학 좌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 그리스 철학과 원시 기독교를 접목한 인물이다. 그는 서양 사상의 원형을 이루는 두 개의 전통, 곧 그리스 철학에 배경을 둔 헬레니즘 전통과 기독교 종교에 배경을 둔 헤브라이즘 전통을 하나로 묶어 기독교철학 또는 신학을 출범시켰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계시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플라톤 철학의 옷을 입혔다. 그는 교부철학을 정립한 중세 초기의 최대 철학자, 또는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잠깐! 기독교는 철학이 아니지 않은가? 종교란 추상적인 이론체계가 될 수도 없고, 또 굳이 이론체계로 만들 필요도 없지 않은가? 중세철학의 권위이며 성공회 신부이기도 한 코플스톤은 기독교는 하나의 계시 종교로 세상에 나타났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는 원시 기독교의 기본 과제는 기독교를 하나의 철학 체계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고 세상을 회개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의 말씀은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준다. 그러나 선후관계로 보면 기독교도는 예수의 말씀이 이치에 맞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기 때문에 그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반면 철학은 항상 이치를 따진다. 이치에 맞으면 받아들이고, 이치에 맞지 않으면 내친다. 그것이 바로 철학의 기본 속성이다. 바로 이 교차 지점에 믿음(fides)과 이성(ratio) 사이의 긴장 관계가 숨어있다. 그러면 믿음과 이성은 대립과 충돌의 관계인가, 아니면 균형과 조화의 관계인가? 서양 사상의 지적 전통은 양자의 관계를 후자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1998년 로마 가톨릭 교황 바오로 2세가 발표한 “믿음과 이성은 인간 정신이 진리를 바라보면서 날아오르는 두 날개”라는 [신앙과 이성의 회칙]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종교는 이성과 배치되지 않고, 오히려 이성을 요청한다는 메시지다. 믿음은 광기와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함께 날아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과 이성이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두 날개라는 견해는 중세 후기에 등장하는 스콜라 철학에서 공고화되지만, 믿음과 이성의 균형을 중시하는 것은 기독교 신학의 토대를 세운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이미 강조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로 귀의하기까지의 정신 편력은 그가 쓴 [고백록]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은 서양 자서전 문학의 효시로서, 어린 시절의 부끄러운 기억과 젊은 날의 방황에 대한 고백을 기도문 형식으로 담고 있다. 팔딱팔딱 튀는 문학적 감수성이 담긴 글을 읽는 맛도 좋지만, 당대 최고의 지성이 그리는 고대 지중해 세계의 지적 풍토를 읽는 맛도 쏠쏠하다. 어린 시절 한번쯤은 해봤음직한 과일 서리를 두고 “과일이 탐이 나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친구와 과일을 훔치는 행위를 사랑했기 때문에 한 것이다”라고 표현한 대목에서는 심리 묘사가 뛰어난 한 편의 소설을 읽는다.  [고백록]이 오랜 시간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의 근원을 선의 결핍에서 찾는다. 악을 신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죄를 범하는 인간 의지의 나약함에서 찾았다.

 

그래서 이웃집 과수원에서 과일을 따먹는 일과 같은 어린 시절의 장난까지도 악의 증거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이런 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우구스티누스의 답은 미약한 인간은 혼자 힘으로 이 악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고, 인간을 도와주는 신의 전능한 의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인간을 구원하는 신의 의지 –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신의 ‘은총’이라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를 체계적인 논리로 정립한다. 아마도 원시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체계적 교리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성령으로 태어난 인간이었는지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왜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이 서로 다른 위격을 가지면서도 하나가 될 수 있는지 삼위일체에 관한 질문을 던질 필요도 없고, 그에 대한 답을 할 필요도 굳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발전하면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로부터 기독교를 지키기 위해서, 또 신학 이론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논리를 발전시켜야 할 필요성이 점차 커졌다. 기독교의 진리를 지적으로 변호하는 변증론(apologetics)이 신학의 주요 분야로 떠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에 플라톤 철학의 옷을 입혔다. 플라톤은 인간은 진리를 보지 못하는 쇠사슬에 묶인 동굴 속의 죄수와 같다고 했다. 지성(nous)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육안의 눈으로만 보는 것은 한갓 그림자에 불과하고, 그 그림자를 만드는 진짜 세계는 우리가 갇힌 동굴 속 너머 저편에 있다고 했다. 플라톤이 말하는 진짜로 실재하는 세계, 곧 이데아의 세계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서 신의 세계가 되었다. 플라톤은 우리가 사는 세계는 현상 세계라고 했다. 우리는 현상 세계에 있는 것들을 감각을 통해서 보고 듣고 만지면서 그것이 진짜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이데아의 모사에 불과한 가짜라고 했다. 정말 실재하는 것, 곧 이데아는 현상 세계에서는 망각되었다고 했다. 플라톤은 몸과 감각에 묶여 망각된 사실을 다시 기억해내는 것을 철학의 사명으로 삼았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와서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은 신의 개념이 되었다. 신은 완전한 실재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곧 플라톤이 말하는 현상 세계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와서는 불완전한 실재가 되었다. 그 사이에 위치한 인간은 한편으로는 영혼을 가진 완전한 실재이면서 동시에 육체를 가진 불완전한 실재가 된다. 플라톤은 참된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이성의 지도를 받은 절제와 조화를 강조했다. 플라톤은 그러한 자기 절제를 통해서 이데아를 기억해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 참된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은 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완전한 실재인 신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를 기억해 낸다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완전한 실재인 신을 기억해내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적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철학이라는 옷을 입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살았던 시대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허용되고, 또 마침내 로마제국의 공식 국교가 되는 시기였다. 제국이 공인한 유일무이한 종교로서 기독교가 가진 당면한 과제는 어떻게 기독교를 로마인에게 이치에 맞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은 이 물음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나라]에서 신을 멀리 하는 나라를 하나의 강도 집단으로 봤다. 그것은 신을 멀리 하려는 인간의 교만의 결과이다. 이러한 교만한 자의 공동체가 아닌, 겸손하게 신의 은총에 의한 구원을 고대하는 공동체가 바로 신의 나라다.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신의 나라는 기독교 공동체 곧 교회를 말한다.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제국이 사라진 이후에도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론체계(교의)를 구축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에 필요한 제도로서의 교회이론을 세운 ‘교회의 아버지’(교부)였다. 그가 세운 이론을 교부철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정재영 / 철학자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2,30대에 언론사 기자를 지냈다. 나이 40에 늦깎이 유학생으로 영국에 건너가 워릭대에서 사회 존재와 인간의 이해에 대한 리얼리즘 접근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기도 양평에 있는 대부산 중턱에 자리를 잡고 철학 저술 작업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 1, 2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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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o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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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기는 게르만 민족의 이동으로부터 시작된다. 게르만 민족의 이동으로 시작된 유럽 민족의 대이동은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접촉을 야기했다. 그 결과 진취적인 유목민족이 가지고 있던 목축에 관한 기술과 도구가 농경민족에게 전해지면서 농업의 혁신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농업의 혁신은 풍족한 농업 생산물을 가질 수 있게 하여 중세기의 생산관계인 봉건제도를 빠르게 정착시켰고, 사회에는 잉여 생산물이 축적되었다. 중세기 농업 혁신으로 인한 잉여 생산물의 축적은 사회에 경제적인 여유를 제공하였고, 이는 12세기 이후 중세기의 대학 설립의 기초가 되었다.

 

 

 

 

스콜라 철학은 대학의 설립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중세기 초 교부철학은 교부(敎父), 즉 성직자들에 의한 철학으로, 비교적 초월주의적인 성격이 강한 기독교 철학이다. 대학의 등장은 교부철학이 스콜라 철학으로 대체되는 계기가 되었다. 스콜라 철학은 학자(스콜라)에 의한 철학으로, 그리스 철학(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결합하여 성립된 철학 체계이다. 따라서 스콜라 철학은 교부철학에 비해서 합리주의적 가치가 강조되는 기독교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스콜라 철학도 여전히 초월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면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스콜라 철학자들은 신이 인간의 삶에 개입하는 일반적인 방식은 합리적인 자연법칙을 통해서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대학의 등장은 중세기를 기독교의 초월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정신과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정신이 공존하는 시대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그 중심에 스콜라 철학이 있고, 스콜라 철학의 정점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1224년(혹은 1226년) 이탈리아의 나폴리 근교에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 나폴리 대학에서 수학하고, 1245년 파리 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 곳에서 당시 대학자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를 만나는데, 그와 함께 몇 해 동안 쾰른에서 연구 생활을 한 것을 제외하면 거의 10 년 여를 파리 대학에서 보낸다. 그런데 당시의 파리 대학은 신앙과 이성의 갈등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1215년 로마 교황청은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를 금지하고, 1231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담긴 오류를 시정하도록 권고한 위원회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1250년 경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강의금지령이 해제된 후에도, 신앙과 이성에 대한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중세기 철학자들을 논쟁의 소용돌이에 빠뜨린 중요한 두 개의 주제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신앙과 이성의 긴장에 관한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보편자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서는 첫 번째 문제에 대한 아퀴나스의 입장을 살펴보면서, 13세기 중세기 스콜라 철학, 혹은 스콜라 신학에 대해 이해해 보기로 하자.

섬네일 이미지

14세기 이탈리아 화가가 그린 토마스 아퀴나스의 벽화(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 내부).

 

 

 

 

신앙과 이성의 긴장에 대한 중세 철학자들의 입장은 매우 다양했다. 즉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말한 터툴리안과 같이 극단적으로 신앙을 우위에 둔 입장에서부터, 보에티우스처럼 계시적 진리를 받아들이지만 철학의 합리적 진리를 여전히 강조하는 입장까지 매우 다양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랍의 철학자, 아베로에스(Averroes)의 영향을 받은 일군의 신학자들은 신앙의 진리와 이성의 진리는 별개의 것이고, 따라서 진리는 두 개라는 이중 진리론(double-truth theory)을 통해서 그러한 갈등을 해소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퀴나스가 보기에, 이중 진리론은 하나의 현상에 대한 신앙적 관점에서의 진리와 이성적 관점에서의 진리가 서로 충돌할 때도 여전히 둘 다 받아들일 수 있다는 모순적인 주장을 한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운 해결이 아니었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신이 특별한 은총으로 부여한 계시적
진리와 신이 부여한 이성에 근거한 이성적 진리는
모순적이지 않다.


아퀴나스는 신학과 철학은 구별되지만, 그 둘이 결코 모순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의 이성에는 고유의 법칙이 있고, 그것을 통해서 신의 개입 없이도 진리를 인식할 수 있고, 따라서 신앙으로 계시된 진리만이 유일한 진리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인간에게는 두 가지 인식 방법과 인식 영역이 있고, 그런 이유 때문에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것과 신의 계시에 의한 인식이 있다. 그리고 그 두 영역은 분명하게 구별되는 것이고, 따라서 경험을 통해서 이성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영역을 다루는 철학과 초자연적인 계시의 진리 영역을 다루는 신학은 구별된다. 그러나 이성의 법칙에 따라 인식된 진리와 계시를 통해서 얻게 된 진리는 서로 보충적일 수는 있지만 결코 모순적이지는 않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철학적 진리와 신학적 진리가 모순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퀴나스에 따르면, 인간의 철학적 진리는 인간이 신에 의해서 창조될 때 부여 받은 이성에 의해서 그 정당성을 갖게 된다. 이성적 진리는 신이 부여한 이성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결코 신이 특별한 은총으로 부여하는 계시적 진리와 충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앙과 이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교부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은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고, 아퀴나스의 입장은 ‘믿기 위해서 이해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이 지식의 토대이며, 이성적 지식보다는 신앙이 우선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믿기 위해서 이해한다’라고 표현된 아퀴나스의 입장을 이성이 신앙을 위한 토대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그의 말은 신앙의 영역과 이성의 영역은 서로 보완적이고, 자연적 이성을 통해서 신앙으로 나갈 수 있다는 합리적 신앙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아퀴나스도 이성에 의한 지식을 신앙(계시)에 의한 지식보다는 낮은 단계의 것으로 보았고, 이성적 사고와 신앙적 사고가 함께 할 때 세계에 대한 완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기독교적 사유 틀 내에 있었던 것이다.

 

 

 

 

교부철학이 플라톤, 정확히 말해서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면, 스콜라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중세기 신학자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중요한 부분이 기독교의 교리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은 본성상 지금의 모습대로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거기에는 변하지 않는 규칙이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입장을 받아들이면, 신의 개입으로 발생하는 기적을 인정할 수도 없었고, 우주를 신의 피조물로 여기기도 어렵다. 또한 당시 기독교 사상은 플라톤의 영향을 받아, 현실 세계에 대한 연구를 성서 연구에 부수적인 것 이상으로 간주하지 않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경험적인 현실 세계에 대한 탐구로부터 시작되고 그러한 탐구는 그 자체로 중요한 가치를 갖는 것으로 인정한다. 그렇다면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어떻게 기독교 신학과 화해시켜 기독교화 할 수 있었을까?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물려받은 가장 중요한 유산은 경험세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과 목적론적 세계관이다. 경험적이고 현실적인 것에 주목한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아퀴나스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에서 출발해야 함을 배웠다.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참된 지식은 신이 인간에게 빛을 비추어서 알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를 “신의 조명설”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신의 직접적인 개입 없이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감각적 대상으로서의 자연물도 실재로 간주하고, 경험과 인간 이성을 통해서 그러한 실재에 대한 지식을 탐구하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경험을 중요시한 점은 아퀴나스의 신의 존재 증명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아퀴나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신은 인간의 정신에 자명하게 드러난다는 이른바 선험적인 증명을 시도했지만, 아퀴나스는 신의 존재가 인간의 감각적 경험을 토대로 한 증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인식된다고 설명함으로써, 경험적 신 존재 증명을 제시한다.

아퀴나스는 완전하고 궁극적인 지식은 신을 아는 지식이고, 그것이 바로 인간의 궁극의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바로 목적론적 사상이다. 이 점은 특히 그의 윤리학에서 잘 나타난다. 목적론에 따르면, 인간의 행위는 물론 인간 존재 자체에도 목적이 있다. 인간에게 존재의 목적이 있듯이, 인간을 구성하는 모든 기관에도 목적이 있다. 예컨대 눈은 보기 위해 존재하고, 귀는 듣기 위해 존재한다. 즉 눈은 ‘보기 위함’이라는 목적을, 귀는 ‘듣기 위함’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자신에게 부여된 목적을 잘 실행할 때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존재 상태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그 존재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행위 할 때 도덕적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신체의 일부를 그 존재 목적에 어긋나게 사용한다면, 그 행위는 자연스럽지 못하고, 부도덕하다. 중세기 기독교가 성윤리에서 특별히 자위나 동성애를 어떤 성적인 부도덕보다 강한 비난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인간의 성 행위의 목적과 성기관의 존재 목적을 생식이라고 보았던 기독교 윤리에 따르면, 생식이라는 존재 목적에서 벗어난 행위들은 자연스럽지 않은, 부도덕한 행위로 여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받아들이면서, 인간의 궁극의 목적이 행복이라는 데도 동의한다. 즉 행복이 인간이 추구해야 할, 인간의 궁극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행복 그 자체는 절대적인 것이어야 하고, 영원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신을 아는 지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철학적 사유, 관조적 삶에서 행복을 찾은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답게 완전하고 궁극적인 지식은 신을 아는 지식이고, 그것이 바로 인간의 궁극의 행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아퀴나스가 스콜라 철학이라는 거대한 신전을 완성하는 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라는 재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그 철학자’라고 칭한 것처럼, 아우구스티누스를 ‘그 신학자’라고 칭했다. 다시 말해서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철학자라고 하면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였던 것처럼, 신학자라고 하면 아우구스티누스, 단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스콜라 철학이라는 거대한 신전을 건축하기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재료는 아우구스티누스인 셈이다. 물론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많은 점에서 다르다. 그러나 아퀴나스가 그의 대표적인 저서 중 하나인 [이방인 대전]의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의 과제는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신에 대한 책임 있는 이야기”로서 신학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아퀴나스가 아우구스티누스와 달리 신앙의 영역과 이성의 영역을 구분했지만, 신앙의 영역으로서의 신학에 초월적인 계시와 기독교 구원의 신비주의적 영역을 남겨둔 것은 플라톤주의적이며, 아우구스티누스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철학자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가 아니었지만, 신학자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였다고 평가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결국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누스라는 눈을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수용함으로써 스콜라 철학이라는 거대한 신전을 완성한 셈이다.

 

아퀴나스는 1272년, 나폴리 대학으로 돌아가서 연구와 강의를 계속하다가, 1273년 일종의 무아지경의 깨달음을 체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내가 이제껏 쓴 것들은, 내가 보았고 나에게 계시된 것에 비한다면 한낱 지푸라기처럼 느껴졌다.”고 말하고, 강의와 저술 활동을 중지했다고 한다. 50년이라는 길지 않은 삶을 오직 연구와 저술, 그리고 대학에서의 강의로 보낸 아퀴나스.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를 보내면서도 절대자인 신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신에 대한 지적인 여정을 멈추지 않은 아퀴나스. 그는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종교와 이성 사이의 올바른 관계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촉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송하석 / 아주대 철학 교수
불어불문학을 공부하다 철학에 관심을 갖고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학교에서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클레어몬트 대학에서 진리론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언어철학, 심리철학, 논리학에 관한 여러 논문을 발표하였고, 우리 사회가 논리적인 사회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리더를 위한 논리훈련]을 출간하였다. 지금은 아주대학교 기초교육대학에서 철학과 논리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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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o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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