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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5.03 스콜라철학의 완성
  2. 2010.05.03 이븐 루슈드(아베로에스) (2)

중세기는 게르만 민족의 이동으로부터 시작된다. 게르만 민족의 이동으로 시작된 유럽 민족의 대이동은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접촉을 야기했다. 그 결과 진취적인 유목민족이 가지고 있던 목축에 관한 기술과 도구가 농경민족에게 전해지면서 농업의 혁신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농업의 혁신은 풍족한 농업 생산물을 가질 수 있게 하여 중세기의 생산관계인 봉건제도를 빠르게 정착시켰고, 사회에는 잉여 생산물이 축적되었다. 중세기 농업 혁신으로 인한 잉여 생산물의 축적은 사회에 경제적인 여유를 제공하였고, 이는 12세기 이후 중세기의 대학 설립의 기초가 되었다.

 

 

 

 

스콜라 철학은 대학의 설립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중세기 초 교부철학은 교부(敎父), 즉 성직자들에 의한 철학으로, 비교적 초월주의적인 성격이 강한 기독교 철학이다. 대학의 등장은 교부철학이 스콜라 철학으로 대체되는 계기가 되었다. 스콜라 철학은 학자(스콜라)에 의한 철학으로, 그리스 철학(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결합하여 성립된 철학 체계이다. 따라서 스콜라 철학은 교부철학에 비해서 합리주의적 가치가 강조되는 기독교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스콜라 철학도 여전히 초월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면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스콜라 철학자들은 신이 인간의 삶에 개입하는 일반적인 방식은 합리적인 자연법칙을 통해서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대학의 등장은 중세기를 기독교의 초월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정신과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정신이 공존하는 시대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그 중심에 스콜라 철학이 있고, 스콜라 철학의 정점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1224년(혹은 1226년) 이탈리아의 나폴리 근교에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 나폴리 대학에서 수학하고, 1245년 파리 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 곳에서 당시 대학자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를 만나는데, 그와 함께 몇 해 동안 쾰른에서 연구 생활을 한 것을 제외하면 거의 10 년 여를 파리 대학에서 보낸다. 그런데 당시의 파리 대학은 신앙과 이성의 갈등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1215년 로마 교황청은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를 금지하고, 1231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담긴 오류를 시정하도록 권고한 위원회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1250년 경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강의금지령이 해제된 후에도, 신앙과 이성에 대한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중세기 철학자들을 논쟁의 소용돌이에 빠뜨린 중요한 두 개의 주제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신앙과 이성의 긴장에 관한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보편자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서는 첫 번째 문제에 대한 아퀴나스의 입장을 살펴보면서, 13세기 중세기 스콜라 철학, 혹은 스콜라 신학에 대해 이해해 보기로 하자.

섬네일 이미지

14세기 이탈리아 화가가 그린 토마스 아퀴나스의 벽화(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 내부).

 

 

 

 

신앙과 이성의 긴장에 대한 중세 철학자들의 입장은 매우 다양했다. 즉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말한 터툴리안과 같이 극단적으로 신앙을 우위에 둔 입장에서부터, 보에티우스처럼 계시적 진리를 받아들이지만 철학의 합리적 진리를 여전히 강조하는 입장까지 매우 다양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랍의 철학자, 아베로에스(Averroes)의 영향을 받은 일군의 신학자들은 신앙의 진리와 이성의 진리는 별개의 것이고, 따라서 진리는 두 개라는 이중 진리론(double-truth theory)을 통해서 그러한 갈등을 해소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퀴나스가 보기에, 이중 진리론은 하나의 현상에 대한 신앙적 관점에서의 진리와 이성적 관점에서의 진리가 서로 충돌할 때도 여전히 둘 다 받아들일 수 있다는 모순적인 주장을 한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운 해결이 아니었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신이 특별한 은총으로 부여한 계시적
진리와 신이 부여한 이성에 근거한 이성적 진리는
모순적이지 않다.


아퀴나스는 신학과 철학은 구별되지만, 그 둘이 결코 모순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의 이성에는 고유의 법칙이 있고, 그것을 통해서 신의 개입 없이도 진리를 인식할 수 있고, 따라서 신앙으로 계시된 진리만이 유일한 진리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인간에게는 두 가지 인식 방법과 인식 영역이 있고, 그런 이유 때문에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것과 신의 계시에 의한 인식이 있다. 그리고 그 두 영역은 분명하게 구별되는 것이고, 따라서 경험을 통해서 이성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영역을 다루는 철학과 초자연적인 계시의 진리 영역을 다루는 신학은 구별된다. 그러나 이성의 법칙에 따라 인식된 진리와 계시를 통해서 얻게 된 진리는 서로 보충적일 수는 있지만 결코 모순적이지는 않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철학적 진리와 신학적 진리가 모순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퀴나스에 따르면, 인간의 철학적 진리는 인간이 신에 의해서 창조될 때 부여 받은 이성에 의해서 그 정당성을 갖게 된다. 이성적 진리는 신이 부여한 이성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결코 신이 특별한 은총으로 부여하는 계시적 진리와 충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앙과 이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교부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은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고, 아퀴나스의 입장은 ‘믿기 위해서 이해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이 지식의 토대이며, 이성적 지식보다는 신앙이 우선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믿기 위해서 이해한다’라고 표현된 아퀴나스의 입장을 이성이 신앙을 위한 토대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그의 말은 신앙의 영역과 이성의 영역은 서로 보완적이고, 자연적 이성을 통해서 신앙으로 나갈 수 있다는 합리적 신앙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아퀴나스도 이성에 의한 지식을 신앙(계시)에 의한 지식보다는 낮은 단계의 것으로 보았고, 이성적 사고와 신앙적 사고가 함께 할 때 세계에 대한 완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기독교적 사유 틀 내에 있었던 것이다.

 

 

 

 

교부철학이 플라톤, 정확히 말해서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면, 스콜라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중세기 신학자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중요한 부분이 기독교의 교리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은 본성상 지금의 모습대로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거기에는 변하지 않는 규칙이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입장을 받아들이면, 신의 개입으로 발생하는 기적을 인정할 수도 없었고, 우주를 신의 피조물로 여기기도 어렵다. 또한 당시 기독교 사상은 플라톤의 영향을 받아, 현실 세계에 대한 연구를 성서 연구에 부수적인 것 이상으로 간주하지 않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경험적인 현실 세계에 대한 탐구로부터 시작되고 그러한 탐구는 그 자체로 중요한 가치를 갖는 것으로 인정한다. 그렇다면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어떻게 기독교 신학과 화해시켜 기독교화 할 수 있었을까?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물려받은 가장 중요한 유산은 경험세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과 목적론적 세계관이다. 경험적이고 현실적인 것에 주목한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아퀴나스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에서 출발해야 함을 배웠다.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참된 지식은 신이 인간에게 빛을 비추어서 알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를 “신의 조명설”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신의 직접적인 개입 없이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감각적 대상으로서의 자연물도 실재로 간주하고, 경험과 인간 이성을 통해서 그러한 실재에 대한 지식을 탐구하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경험을 중요시한 점은 아퀴나스의 신의 존재 증명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아퀴나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신은 인간의 정신에 자명하게 드러난다는 이른바 선험적인 증명을 시도했지만, 아퀴나스는 신의 존재가 인간의 감각적 경험을 토대로 한 증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인식된다고 설명함으로써, 경험적 신 존재 증명을 제시한다.

아퀴나스는 완전하고 궁극적인 지식은 신을 아는 지식이고, 그것이 바로 인간의 궁극의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바로 목적론적 사상이다. 이 점은 특히 그의 윤리학에서 잘 나타난다. 목적론에 따르면, 인간의 행위는 물론 인간 존재 자체에도 목적이 있다. 인간에게 존재의 목적이 있듯이, 인간을 구성하는 모든 기관에도 목적이 있다. 예컨대 눈은 보기 위해 존재하고, 귀는 듣기 위해 존재한다. 즉 눈은 ‘보기 위함’이라는 목적을, 귀는 ‘듣기 위함’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자신에게 부여된 목적을 잘 실행할 때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존재 상태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그 존재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행위 할 때 도덕적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신체의 일부를 그 존재 목적에 어긋나게 사용한다면, 그 행위는 자연스럽지 못하고, 부도덕하다. 중세기 기독교가 성윤리에서 특별히 자위나 동성애를 어떤 성적인 부도덕보다 강한 비난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인간의 성 행위의 목적과 성기관의 존재 목적을 생식이라고 보았던 기독교 윤리에 따르면, 생식이라는 존재 목적에서 벗어난 행위들은 자연스럽지 않은, 부도덕한 행위로 여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받아들이면서, 인간의 궁극의 목적이 행복이라는 데도 동의한다. 즉 행복이 인간이 추구해야 할, 인간의 궁극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행복 그 자체는 절대적인 것이어야 하고, 영원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신을 아는 지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철학적 사유, 관조적 삶에서 행복을 찾은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답게 완전하고 궁극적인 지식은 신을 아는 지식이고, 그것이 바로 인간의 궁극의 행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아퀴나스가 스콜라 철학이라는 거대한 신전을 완성하는 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라는 재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그 철학자’라고 칭한 것처럼, 아우구스티누스를 ‘그 신학자’라고 칭했다. 다시 말해서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철학자라고 하면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였던 것처럼, 신학자라고 하면 아우구스티누스, 단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스콜라 철학이라는 거대한 신전을 건축하기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재료는 아우구스티누스인 셈이다. 물론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많은 점에서 다르다. 그러나 아퀴나스가 그의 대표적인 저서 중 하나인 [이방인 대전]의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의 과제는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신에 대한 책임 있는 이야기”로서 신학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아퀴나스가 아우구스티누스와 달리 신앙의 영역과 이성의 영역을 구분했지만, 신앙의 영역으로서의 신학에 초월적인 계시와 기독교 구원의 신비주의적 영역을 남겨둔 것은 플라톤주의적이며, 아우구스티누스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철학자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가 아니었지만, 신학자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였다고 평가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결국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누스라는 눈을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수용함으로써 스콜라 철학이라는 거대한 신전을 완성한 셈이다.

 

아퀴나스는 1272년, 나폴리 대학으로 돌아가서 연구와 강의를 계속하다가, 1273년 일종의 무아지경의 깨달음을 체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내가 이제껏 쓴 것들은, 내가 보았고 나에게 계시된 것에 비한다면 한낱 지푸라기처럼 느껴졌다.”고 말하고, 강의와 저술 활동을 중지했다고 한다. 50년이라는 길지 않은 삶을 오직 연구와 저술, 그리고 대학에서의 강의로 보낸 아퀴나스.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를 보내면서도 절대자인 신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신에 대한 지적인 여정을 멈추지 않은 아퀴나스. 그는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종교와 이성 사이의 올바른 관계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촉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송하석 / 아주대 철학 교수
불어불문학을 공부하다 철학에 관심을 갖고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학교에서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클레어몬트 대학에서 진리론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언어철학, 심리철학, 논리학에 관한 여러 논문을 발표하였고, 우리 사회가 논리적인 사회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리더를 위한 논리훈련]을 출간하였다. 지금은 아주대학교 기초교육대학에서 철학과 논리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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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o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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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븐 루슈드를 아는가?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라파엘로가 바티칸 궁에 그린 [아테네 학당]에는 터번을 쓴 인물이 등장한다. 이 사람이 바로 이븐 루슈드다. [아테네 학당]에 나오는 유일한 이슬람 학자로, 유럽에서는 아베로에스(Averroes)라는 라틴어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단테가 쓴 [신곡]에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철학자들과 함께 ‘림보’(기독교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이들이 가는 곳)로 간 인물로 나온다. 이슬람 철학자가 왜 로마 바티칸 궁 벽화에 그려졌을까? 그는 아랍어로 기록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라틴어와 히브리어로 번역해서 유럽에 전한 사람이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26년간 이 작업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책에는 간단한 약론에서 자세한 상론까지 세 종류로 나누어 주석을 달았다. 만약 루슈드의 작업이 없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유럽에 알려지지도 않았고, 기독교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옷을 입힌 중세 스콜라 철학이 탄생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스콜라 철학에서는 이름 대신 ‘철학자’라는 보통명사로 통용되는 이가 있다. 이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리킨다. ‘철학자’와 함께 ‘주석자’라는 호칭으로 거명되는 이도 있다. 이 주석자는 루슈드를 지칭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아무리 생각해도 통상적인 표기 방식은 아니다. 처음 ‘철학자’와 ‘주석자’가 중세 유럽에 등장할 때 그들은 모두 이슬람 세계에서 건너 온 수상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철학자가 그 혐의를 벗은 뒤에도 주석자는 철학자를 오독한 인물로 인용되었다. 주석자는 위대한 철학자를 오염시킨 간사한 이교도였을 뿐이었다.

 

나는 이것을 ‘루슈드 두들겨 패기’라고 부르고 싶다. 체제에 위협이 된다고 여겨지는 인물, 또는 사상이 소개될 때 종종 나타나는 양상이다. 위험한 철학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감추다가, 더 이상 덮을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속죄양을 만들어서 두들겨 패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때로는 집단 광기가 동원된다. 한 마디로 마녀 사냥이다. 잠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그토록 위험한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상식을 존중하고 중용의 덕을 유난히 강조한 철학자가 아닌가? 상식과 중용의 철학자로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소개한 이븐 루슈드를 위험한 인물로 두들겨 패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의문은 또 있다. 플라톤과 더불어 서양철학의 전통을 세운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떻게 이븐 루슈드에 의해서 유럽에 전해졌다는 말인가?


이 퍼즐을 풀기 위해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기독교 유럽 세계에서 실전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중세 초기 유럽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논리학에 대한 단편적 기록 이외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가 <철학의 숲> 아우구스티누스 편에서 본 바와 같이 중세 초기의 철학은 기독교에 플라톤 철학을 결합한 교부 철학이 성행했다. 그러면 도대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어디에서 갑자기 나타났다는 말인가? 그것은 이슬람 세계에서 건너왔다. 기독교 유럽에서 실전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이슬람 세계에서 계승 발전되고 있었던 것이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 터번을 쓴 모습으로 그려진루슈드(아베로에스). [아테네 학당]에 등장하는 유일한 이슬람 학자다.

 

 

 

 

14세기 이탈리아 화가가 그린 이븐 루슈드(아베로에스)의 모습


흔히 중세를 암흑 시대라고 부른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물 페트라르카가 처음 쓴 암흑 시대라는 표현은 중세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런가? 로마 제국, 더 정확하게 말하면 로마를 수도로 하는 서로마제국이 무너진 뒤 지중해 세계의 질서는 크게 재편된다. 이슬람 세력은 북부 아프리카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까지 세력을 넓혀나간다. 지금 우리가 유럽이라고 부르는 지역은 이슬람 제국에 의해 포위되어 있는 형국이다. 이 시기를 유럽에서는 암흑 시대라고 부르지만, 이슬람에서는 황금 시대라고 부른다. 물리적인 힘에서도 이슬람이 유럽보다 컸지만, 문화의 힘에서도 이슬람이 유럽을 압도하는 시기였다. 역사가는 이 때를 ‘이슬람의 황금시대’(750~1258)라고 부른다.

 

이븐 루슈드는 1126년 에스파냐 코르도바에서 태어났다. 근대 이전의 대부분 학자처럼 그는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당대 최고의 이슬람 학자들이 그렇듯이 그는 칼리프(이슬람 교단의 최고 지도자) 가족의 건강을 책임지는 궁정의사이기도 했다. 철학과 과학, 그리고 의학 분야에 남긴 그의 업적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근대 의학이 출범한 곳으로 이름이 높은 이탈리아 파도바 대학의 의학부 교수들은 대부분 루슈드의 제자들이다. 기독교 세력에 의해 코르도바에서 쫓겨난 그의 제자들이 무더기로 베네치아 근처에 있는 파도바 대학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의학 분야에 관한 한, 당시 기독교 유럽의 학문 수준은 이슬람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과학 분야에서도 그의 공헌은 크다. 과학사라는 학문을 개척한 20세기 과학사가 조지 사튼에 따르면 이븐 루슈드와 그의 주장을 따르는 아베로이즘(Averroism)은 16세기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철학과 과학이 분리되지 않았던 근대 이전의 시기에 과학의 역사는 곧 철학의 역사이기도 하다. 사튼은 마녀 사냥을 당했던 이슬람 학자 이븐 루슈드의 명예 회복과 역사에서 지워진 아베로이즘 4백 년의 역사를 다시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븐 루슈드가 주창한 학문이 고대 학문에서 근대 학문으로 넘어가는 진정한 이행 과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사튼은 말한다. 이 말에 동의한다. 루슈드가 잃어버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찾아 주었듯이, 우리도 루슈드 철학의 제 자리를 찾아주어야 한다. 

 

철학의 눈으로 본 이븐 루슈드는 이성을 중시한 합리주의자다. 그것은 이슬람 교리에 반대하는 철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한 알 가잘리의 [철학자의 모순]을 재반박한 이븐 루슈드의 [모순의 모순]에서 잘 드러난다. 가잘리와 루슈드가 제기한 물음은 신학과 철학이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이 질문을 살짝 돌려서 말한다면 신앙과 이성은 서로 화합 가능한가 하는 물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잘리가 철학에 대한 신학의 우위, 또는 이성에 대한 신앙의 우위를 주장했다면, 루슈드는 가잘리의 주장에 대한 이의제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신학이란 이슬람 성전인 [쿠란]에 대한 해석과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을 기록한 [순나]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하디스]에서 기초한 이슬람 신학이며, 철학이란 고대 그리스 철학 원전에 대한 번역과 주해를 기초로 하는 철학 연구를 말한다. 루슈드는 이슬람 율법이 철학 연구를 결코 금하지 않으며, 오히려 율법은 논증적 추론을 하는 철학 연구를 명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루슈드는 철학과 신학의 조화를 변호하는 것을 뛰어 넘어서 철학이야말로 진리의 최종 중재자라고까지 주장한다. 신앙에 대한 이성의 우위로 해석될 수 있는 이 주장은 후에 그가 이단으로 단죄되는 하나의 원인이 된다. 그는 율법학자들이 주도하는 철학에 대한 박해가 본격화되었을 때 코르도바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 루세나에 감금되었고 그가 쓴 책들은 불태워졌다. 그의 나이 70이 되는 만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듬해 그는 감금에서 풀려났지만, 모로코에서 생을 마감했다.

블랙 아리스토텔레스. 이슬람 세계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검은 피부를 가진 흑인으로 그려진다.

 

 

 

 

눈을 다시 유럽 세계로 돌리면, 루슈드는 오늘의 서구사상의 전통을 이어준 사람이다. 그는 서구 사상의 큰 흐름을 이루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발굴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중세 유럽에 전달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서구 사상의 큰 특징으로 자리잡은 합리주의 전통을 이어준 인물이다. 그 점에서 기독교 유럽 세계는 루슈드에게 큰 빚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 빚을 갚기는커녕 두들겨 팬 죄가 있다. 유럽의 눈으로 정리한 지적 풍토에서 루슈드는 때로는 이름 없는 적으로, 때로는 기독교 세계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서 침투시킨 ‘사상 전사’ 쯤으로 등장한다. 그러한 흔적은 루슈드를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평가에서 절정을 이룬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베노초 고촐리(Benozzo Gozzoli)가 그린 [아베로에스에 대한 아퀴나스의 승리](부분).

 

 

 

 

정재영 / 철학자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2,30대에 언론사 기자를 지냈다. 나이 40에 늦깎이 유학생으로 영국에 건너가 워릭대에서 사회 존재와 인간의 이해에 대한 리얼리즘 접근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기도 양평에 있는 대부산 중턱에 자리를 잡고 철학 저술 작업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 1, 2권이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고촐리가 그린 그림 [아베로에스에 대한 아퀴나스의 승리]는 스콜라 철학의 왕으로 칭송되는 아퀴나스와 그의 발 밑에 납작 꿇어 엎드린 루슈드를 대조시키고 있다. 과연 루슈드와 아퀴나스는 그런 사이인가? 그들은 이슬람 세계와 기독교 세계를 각각 대표해서 서로 싸운 사이인가? 아니다. 이건 집단 광기가 빚어낸 창작이다. 루슈드는 이슬람 세계에서 박해를 받은 일종의 반체제 인사이며, 아퀴나스는 그 당시 수상쩍게 생각한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그 철학자를 소개한 주석자 루슈드를 적극 받아들여 방대한 신학체계로 녹여낸 인물이다.

 

유럽 출신인 과학사가 조지 사튼은 유럽 세계가 이슬람 세계에게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 심정으로 이슬람 학자들을 만나 역사의 조각을 맞추었다고 한다. 그렇다. 이것이 역사의 제 자리를 찾는 첫 걸음인지도 모른다.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해서 분명하게 밝혀 두자면, 나는 여기에서 이슬람 철학이 기독교 철학보다 낫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 역도 아니다. 소통이 막힐 때 벌어지는 대결구도의 위험성을 고발하는 것이다.


루슈드는 소통의 길을 연 철학자지만, 닫힌 소통 구조에서 큰 피해를 본 철학자였다. 나는 루슈드를 통해 소통 공간이 막힐 때 나타나는 집단 광기를 읽는다. 루슈드가 아닌 아베로에스는 기독교 유럽을 위협하는 인물의 이름이었고, 아베로에스가 아닌 루슈드는 이슬람을 흔드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불행하게도 그는 이슬람 세계에서도 결코 환영받는 인물이 아니었다. 역사의 아이러니지만, 그의 철학은 이슬람 세계가 아닌 기독교 세계에 오히려 더 큰 영향을 끼쳤다. 과연 그는 어떤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되기를 원할까? 이슬람의 이븐 루슈드일까, 아니면 유럽의 아베로에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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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o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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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9901.textcube.com BlogIcon Jmi™ 2010.05.04 23: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트랙백 감사합니다. ^^
    저에게 철학은 넘 어렵기만 하네요. 철학적 글을 요약정리하는 것도 매우 힘들었답니다. ㅜㅜ

    • Favicon of http://gofly.textcube.com BlogIcon goFly 2010.05.06 06:18  댓글주소  수정/삭제

      ㅋㅋㅋ 누구에게나 철학은 넘 어려운듯합니다....

      제 전공은 아니지만 워낙에 생각하는 것을 좋아 하는 터라 철학을 좋아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읽기 위해 읽어야 하는 Organon이라고 하던가요....

      아무튼 오르가논에 해당하는 명제론과 범주론을 한국 유명 철학가가 가장 쉬운 해석본을 가지고 해석해 놓은 책을 읽었을 때도 4페이지 읽는데 일주일이 걸리더군요.....

      모두들 힘들어 하는거 같습니다.....힘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