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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6.13 코기토의 철학자 데카르트

기독교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중세 철학을 만들고 발전시킨 것은 바로 이 둘이다. 이들 사이의 부조화를 발견하고 해결하여 조화롭게 만드는 것이 중세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목표’라는 것은 한 가지를 전제한다. 그것은 기독교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그 어떤 것도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중세 학자들에게 이 둘은 의심할 수 없고 거부할 수 없는 진리, 즉 도그마(dogma)였다.


그러나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기독교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확고부동한 지위는 점차 흔들리게 된다. 성경 해석에 있어 문제가 발생했을 때, 신학적 권위를 가지고 해결책을 제시했던 교황청은 루터 이후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 새롭게 알려지기 시작했던 다양한 그리스 철학자들의 글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독자적 지위를 위협했다. 다양한 그리스 철학자들의 글들로부터 우주와 인간에 대한 다른 생각들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런 생각들이 하나로 통일될 수 없다는 것도 점차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도그마의 위기! 이것이 15, 16세기 유럽의 지적인 분위기였다.

 

 

 

 

도그마의 위기는 회의주의(skepticism)를 낳는다. 여기서 회의주의란 절대적 진리, 의심할 수 없는 진리에 대한 회의를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지적 능력을 이용해 절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없으며, 나아가 절대적 진리가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인간의 감각 경험은 불완전하다. 자라를 보고 놀란 당신은 솥뚜껑을 보고 놀라기도 한다. 설사 당신이 그런 착각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감각 경험 그 자체는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당신은 지금 컴퓨터를 보고 있지만, 실제로 당신 앞에 컴퓨터가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다. 당신은 매트릭스 안에 갇혀 전기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는 감각적 자극을 받고 있을 수도 있다. 당신이 보고 있는 컴퓨터가 실제로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와 다르게 실제로 컴퓨터가 있는 것은 아니며 단지 매트릭스로부터 전달된 전기 신호를 받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렇듯 감각 경험만으로는 이 세계가 매트릭스의 세계인지 그렇지 않은지 결정할 수 없다. 파란 알약과 빨간 알약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감각 경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물론 이런 감각 경험에 대한 회의는 인간의 다른 지적 능력으로 확장될 수 있다.


몽테뉴(Montaigne, 1533~1592)는 대표적인 16세기 회의주의자다. 당시 새롭게 발견된 퓌론주의(Pyrrhonism)에 경도된 사상가들은 절대적 진리에 도달하기에는 인간의 지적 능력은 불완전하다고 강변한다. 이 회의주의자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회의주의는 극복할 필요가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우선, 회의주의는 극복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다양한 과학기술들을 유용하게 사용한다. 이런 유용한 과학기술들은 다양한 감각 경험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만약 감각 경험들을 신뢰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다양한 과학기술들을 신뢰할 수 없다. 따라서 철저한 회의주의자들은 과학기술들을 신뢰할 수 없으며, 따라서 과학기술의 유용성 같은 것도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은 문제다. 특히 과학혁명 이후의 철학자와 과학자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그들은 과학에 의해서 사회는 풍요로워지고 인류는 진보할 수 있으리라 믿었으며, 더 나아가 이것을 신이 그들에게 부여한 중요한 사명으로 여기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에게 지식의 확실성을 부정하는 회의주의는 당연히 극복해야할 장애물이었다.

서양 근대철학의 아버지, 르네 데카르트.

 

그럼 어떻게 회의주의를 극복할 것인가? 물론 다양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인간은 절대적 진리를 획득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개연적인 진리는 획득할 수 있다는 온건한 주장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런 주장은 회의주의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지식의 유용성을 설명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이와 달리 회의주의자들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방안은 없는가? 즉 인류가 절대적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거나, 혹은 그런 절대적 지식을 제시할 수 있는가? 이 일을 하려고 한 사람이 바로 데카르트이다. 그는 회의주의에 맞서, 인간 지성은 절대 확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여겼으며 그런 절대적 지식을 제시한다. 그의 목표는 이성을 사용하여 철학적 진리, 즉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데카르트는 1596년 프랑스의 투렌(Touraine)이라는 지역에서 태어났다. 성장한 이후 주로 네덜란드에서 활동했다. 말년에는 스웨덴에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철학을 존경하던 스웨덴 여왕의 초청 때문이었다. 결국 1650년 데카르트는 스웨덴의 추운 날씨를 견디지 못하고 숨을 거두게 된다. 데카르트는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근대 철학의 두 기둥이었던 합리론과 경험론 중에서 합리론의 핵심 인물이기도 하다. 더불어 그는 과학자이자 수학자였으며,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물론 그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고 말할 때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것과 분명히 다르다. 아퀴나스가 훌륭한 철학자이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신학자였다면, 데카르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과학자이자 철학자였다.

 

데카르트를 초청한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과 데카르트(맨 오른쪽).


이제 설명해보자. 그는 어떻게 철학적 진리에 도달했으며 그렇게 해서 도달한 철학적 진리는 무엇인가? 회의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데카르트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회의, 즉 의심이었다. 그는 회의주의자들의 의심을 끝까지 그리고 철저하게 밀고 나가고자 했다. 만약 그런 의심이 성공적이라면, 그런 의심의 끝에서 더 이상 의심될 수 없는 무언가가 발견되리라고 기대했다. 이런 의심의 방법을 철학자들은 방법적 회의라고 한다. 의심에 의심을 거듭한 끝에 결코 의심될 수 없는 것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럼 무엇을 의심하는가? 우리는 모든 개별적 지식들을 철저하고 완벽하게 의심할 수 있는가? 이런 의심은 끝나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의심스러운 개별적인 지식들은 그 수가 무척 많고 또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철저하고 완벽한 의심을 할 수 있는가? 한 가지 길은 그런 다양한 개별적 지식을 낳는 지적인 방법을 의심하는 것이다. 즉 다양한 지식을 낳는다고 여겨지는 지적인 방법들이 과연 확실한 진리를 보장하는지 검토하는 것이다. 그럼 우리의 지식은 어떤 방법을 통해서 획득되는가? 아마도 첫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감각 경험을 통한 지식의 획득이다. 나는 경험을 통해서 내 앞에 있는 노란색 지폐가 5만원권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런 감각 경험이라는 방법은 지식의 확실성을 보장하지 못한다. 우리는 착각했을 수 있다. 사실은 5천원권 지폐인데, 나의 기대와 희망이 5만원권 지폐로 착각하게 만든 것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데카르트는 감각 경험은 확실한 지식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또 다른 논변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꿈의 가설이다. 나는 어제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으며, 그 비행기 창문 너머로 해가 뜨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꿈 속에서도 무언가를 경험하고 무언가를 본다. 즉 감각 경험은 꿈 속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각 경험만으로는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태양이 실제로 있는 것인지, 단지 꿈 속에 있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즉 감각 경험은 우리에게 확실한 지식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꿈 속이든 꿈 밖이든 항상 성립하는 것도 있다. 가령, 2+3=5라는 것은 꿈이 아닌 세계에서도, 꿈에서도 참이다. 우리가 매트릭스 속에 갇혀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2+3=5이고, 삼각형은 세 개의 변을 가지며, 둥근 사각형은 불가능하다. 꿈에서도 이런 지식이 성립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러한 수학적 지식들을 획득하는 데 있어, 감각 경험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지식들은 감각 경험이 아니라 순수하게 정신적인 방법을 통해서 획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그 순수하게 정신적인 방법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납득할 만한 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성, 직관, 연역과 같은 다소 어려운 철학적 개념이 필요하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전반적인 의도를 이해하는 것만이 목표라면 굳이 그런 개념들을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순수하게 정신적인 방법을 통해 지식의 확실성이 보장되는지 여부다. 이 순간 데카르트는 다소 엉뚱한 상상을 덧붙인다. 그것은 유명한 ‘악마의 가설’이다. 전능한 악마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수학적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 즉 순수하게 정신적인 방법을 그 악마가 만들었다고 해보자. 더불어 악마는 그 순수하게 정신적인 방법을 통해서 지식을 획득할 때마다 인간이 실수를 저지르도록 장치를 해놓았다고 가정하자. 예를 들어 우리가 ‘2 더하기 3이 5’라는 것이 너무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악마가 만들어 놓은 속임수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런 악마가 존재할 수 있다면, 순수하게 정신적인 능력을 통해서 획득한 지식의 확실성 역시 충분하게 의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수학적 진리를 포함해서 가능한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 그런데, 의심에 의심을 계속하던 데카르트는 의심의 끄트머리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ego cogito, ergo sum)’라는 진리는 아주 확고하고 확실한 것이고, 회의론자들이 제기하는 가당치 않은 억측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것임을 주목하고서, 이것을 내가 찾고 있는 제일원리로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 [방법서설] 중에서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 하더라도, 꿈을 꾸고 있는 나는 존재한다. 내가 지금 매트릭스에 갇혀 있다고 하더라도, 매트릭스로부터 전기 자극을 받고 있는 나는 존재한다. 내가 지금 전능한 악마에서 철저히 속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속임을 당하는 나는 반드시 존재한다. 이런 의심을 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도, 의심을 하는 나는 존재한다. 나는 의심한다, 즉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보통 ‘코기토’라고 불리는 바로 이것이 회의주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데카르트가 찾아낸 절대 확실한 철학적 진리다. 그런데 코기토에 등장하는 ‘나’는 무엇인가? 방법적 회의를 통해 내가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르는 데 있어 나의 물질적인 부분, 즉 신체는 어떤 역할도 하지 못했다. 오로지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내가 존재한다는 결론에 영향을 주었을 뿐이다. 결국 코기토에 등장하는 ‘나’는 사유하는 무엇 혹은 정신적인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나의 정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금껏 살펴본 대로, 데카르트는 기독교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라는 두 도그마가 위기에 처한 시대에 새로운 도그마, 즉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절대적이고 의심할 수 없는 진리를 만들어 낸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철학은 신독단론(Neo-dogmatism)의 일종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의심의 끝에서 정신이 존재한다는 진리를 획득한 데카르트는 이제 다른 명징한 진리들을 찾아 나선다. 그 첫 시작은 신의 현존을 증명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물질적인 것의 현존을 증명하는 것이다. 방금 언급했듯이 정신적인 것의 존재는 물질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즉 정신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과 철저하게 구분되며, 그것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데카르트에게 있어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은 서로 독립적인 두 실체가 된다. 이런 점에서 일반적으로 데카르트의 철학은 이원론이라고 불린다. 정신적인 것의 본질은 사유이며, 물질적인 것의 본질은 연장이다. 어렵게 들리지만 간단하다. 정신적이라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며, 물질적이라는 것은 시공간 좌표의 어딘가를 점유한다는 말이다.

 

데카르트가 보기에 여러 동물들 중에서 우리 인간만이 이 두 가지 실체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은 사유를 할 수 있으며, 인간은 신체를 가지고도 있다. 이런 데카르트의 철학을 20세기 심리철학자인 길버트 라일(Gilbert Ryle, 1900~1976)은 ‘기계 속의 유령(the ghost in the machine)이라고 비꼬았다. 사실 데카르트의 이런 심신(心身) 이원론은 20세기 심리철학과 인지과학에 있어 극복해야 할 안티테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많은 심리철학 교과서들은 데카르트의 심신 이원론에서 시작하며, 그것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다양한 현대 철학 이론들을 소개한다.


데카르트의 심신 이원론의 문제점 중에서 하나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자. 그의 심리철학에 있어 중요한 것은 정신과 물질이 서로 독립적인 실체라는 것이다. 이 둘이 독립적인 실체라는 것은 어느 하나가 없어도 다른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가령 인간이 아닌 동물들은 정신이 없는 기계일 뿐이다. 천사나 신과 같은 것은 물질적인 것에 구속되지 않는 정신적인 것일 테다. 암튼 이 둘은 서로 구분될 뿐만 아니라, 존재하기 위해서 서로에게 의존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일견 우리의 경험과 잘 맞지 않는 듯이 보인다. 당신의 신체는 당연히 당신의 마음에 영향을 준다. 가령, 당신의 신체 중 일부가 불에 데었다고 생각해보자. 그럼 그 신체의 변화가 당신의 마음에 어떤 고통을 야기한다. 그리고 그 고통에 대해서 당신은 생각하고 되도록 그것을 피하려고 마음먹을 것이다. 반대 방향도 역시 성립한다.

데카르트의 주요 저작인 [방법서설]의 표지.

 

당신의 마음은 당신의 신체에 영향을 준다. 손을 올리고자 하는 당신의 의도(정신적인 것)는 당신의 손이 올라가는 것(물질적인 것)에 영향을 준다. 이렇게 몸과 마음은 서로 인과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서로 독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철학에서는 이런 인과적 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 그에게 있어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은 서로 독립적인 실체이기 때문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없다. 이 문제는 보통 심신 문제(mind-body problem)라고 불린다. 물론 이것은 데카르트 철학 특유의 문제만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심리철학 이론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등장했지만 여전히 문젯거리로 남아있다.

 

 

 

 

  1. 퓌론주의

    기원전 1세기경에 만들어진 학설이며, 이것의 존재는 섹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에 의해서 기록되어 알려졌다. 기원전 3세기 말 경에 살았던 퓌론(Pyrrho)의 이름을 딴 것이다. 퓌론주의에 따르면 진리라고 생각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설령 그런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것이 진리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2. 심리철학

    마음에 대한 연구를 하는 철학의 한 분야다. 최근 뇌과학, 인지심리학 등의 발전과 더불어 가장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다.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을 주장하는 현대 철학자의 수는 그리 많지 않으며, 대부분이 심신일원론을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심신일원론도 행동주의, 심신동일론, 기능주의 등으로 다양하다.

 

 

 

박일호 / 경희대 포스트 닥터 연구원
대학에서 건축공학, 대학원에서는 과학철학을 전공했다. 고려대학교에서 확률과 인식론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몇 가지 교양 과학책을 번역했으며, 논리학과 분석철학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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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o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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