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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략질을 일삼던 해적이 알렉산더 대왕에게 잡혀왔다. 대왕이 꾸짖었다. “너는 도대체 왜 사람들을 괴롭히는가?” 해적이 거침없이 대꾸했다. “폐하가 사람들을 괴롭히는 이유와 같습니다. 단지 저는 배 한 척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해적이라 부르고, 폐하는 큰 함대를 거느리고 일을 하기 때문에 황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신의 나라 De civitate Dei] 4권에 등장하는 예화다. 그는 여기서 전쟁을 통한 제국의 확장이 해적의 강탈행위와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묻는다. 그리고 명쾌하게 결론을 내린다. 정의가 없는 국가는 해적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예화를 키케로가 쓴 [공화국]에서 빌어왔다(키케로의 기록은 실전되었다).


서양 고대사를 들여다보면 큰 위기가 세 차례쯤 있었다. 그 때마다 당대 최고의 지성이 그 위기에 대한 철학적 진단을 내렸다. 기원전 4세기 고대 그리스에서 도시 국가가 심각하게 부패했을 때 내려진 처방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국가]다. 그로부터 4백 년쯤 뒤 로마 공화정이 붕괴했을 때 키케로는 [공화국]을 집필했다. 또 다시 4백 년이 흘러 로마 제국이 무너지는 시점에서 나온 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22권의 대작 [신의 나라]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책을 쓴 결정적 계기는 410년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족에 의해 로마가 점령된 사건이었다. 그때까지 7백 년 동안 로마는 단 한 차례도 적군에 점령된 적이 없었다. 그런 위대한 로마가 야만족에 의해서 맥없이 짓밟힌 것이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역사의 스펙트럼을 넓혀서 해석하면, 이 사건은 유럽을 호령했던 로마의 영광이 꺾이는 결정적 사건이자, 머지 않아 한 시대의 막이 내릴 것이라는 징후이기도 했다. 종이 호랑이로 전락한 로마는 그 후 게르만족의 계속적인 침공을 받아 476년 마침내 역사 무대에서 사라진다. 역사가들은 로마 멸망을 기점으로 유럽에서 고대가 끝나고, 중세가 시작한다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을 읽기 위해서 우리는 세 개의 좌표를 그린다. 첫 번째는 시간 좌표다. 그는 고대의 끝 자락에 위치한 마지막 고대 철학자이며, 동시에 중세의 첫 대목에 등장하는 최초의 중세 철학자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공간 좌표다. 그는 제정 로마 시대의 라틴 교부에서 활동했지만, 그가 주로 활동한 것은 유럽이 아니라 북아프리카였다. 그는 지금의 알제리에 있는 히포 레기우스의 주교로 34년 동안 봉직했다. 그를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 당시 히포는 북아프리카에서 카르타고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고대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놓고 한때 로마와 자웅을 겨루었던 카르타고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수사학을 공부했으며, 로마에서는 수사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적으로는 고대와 중세의 경계지대에 위치해 있고, 공간적으로는 유럽과 아프리카를 넘나들었다.

 

세 번째는 우리가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하는 철학 좌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 그리스 철학과 원시 기독교를 접목한 인물이다. 그는 서양 사상의 원형을 이루는 두 개의 전통, 곧 그리스 철학에 배경을 둔 헬레니즘 전통과 기독교 종교에 배경을 둔 헤브라이즘 전통을 하나로 묶어 기독교철학 또는 신학을 출범시켰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계시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플라톤 철학의 옷을 입혔다. 그는 교부철학을 정립한 중세 초기의 최대 철학자, 또는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잠깐! 기독교는 철학이 아니지 않은가? 종교란 추상적인 이론체계가 될 수도 없고, 또 굳이 이론체계로 만들 필요도 없지 않은가? 중세철학의 권위이며 성공회 신부이기도 한 코플스톤은 기독교는 하나의 계시 종교로 세상에 나타났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는 원시 기독교의 기본 과제는 기독교를 하나의 철학 체계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고 세상을 회개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의 말씀은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준다. 그러나 선후관계로 보면 기독교도는 예수의 말씀이 이치에 맞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기 때문에 그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반면 철학은 항상 이치를 따진다. 이치에 맞으면 받아들이고, 이치에 맞지 않으면 내친다. 그것이 바로 철학의 기본 속성이다. 바로 이 교차 지점에 믿음(fides)과 이성(ratio) 사이의 긴장 관계가 숨어있다. 그러면 믿음과 이성은 대립과 충돌의 관계인가, 아니면 균형과 조화의 관계인가? 서양 사상의 지적 전통은 양자의 관계를 후자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1998년 로마 가톨릭 교황 바오로 2세가 발표한 “믿음과 이성은 인간 정신이 진리를 바라보면서 날아오르는 두 날개”라는 [신앙과 이성의 회칙]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종교는 이성과 배치되지 않고, 오히려 이성을 요청한다는 메시지다. 믿음은 광기와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함께 날아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과 이성이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두 날개라는 견해는 중세 후기에 등장하는 스콜라 철학에서 공고화되지만, 믿음과 이성의 균형을 중시하는 것은 기독교 신학의 토대를 세운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이미 강조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로 귀의하기까지의 정신 편력은 그가 쓴 [고백록]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은 서양 자서전 문학의 효시로서, 어린 시절의 부끄러운 기억과 젊은 날의 방황에 대한 고백을 기도문 형식으로 담고 있다. 팔딱팔딱 튀는 문학적 감수성이 담긴 글을 읽는 맛도 좋지만, 당대 최고의 지성이 그리는 고대 지중해 세계의 지적 풍토를 읽는 맛도 쏠쏠하다. 어린 시절 한번쯤은 해봤음직한 과일 서리를 두고 “과일이 탐이 나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친구와 과일을 훔치는 행위를 사랑했기 때문에 한 것이다”라고 표현한 대목에서는 심리 묘사가 뛰어난 한 편의 소설을 읽는다.  [고백록]이 오랜 시간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의 근원을 선의 결핍에서 찾는다. 악을 신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죄를 범하는 인간 의지의 나약함에서 찾았다.

 

그래서 이웃집 과수원에서 과일을 따먹는 일과 같은 어린 시절의 장난까지도 악의 증거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이런 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우구스티누스의 답은 미약한 인간은 혼자 힘으로 이 악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고, 인간을 도와주는 신의 전능한 의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인간을 구원하는 신의 의지 –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신의 ‘은총’이라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를 체계적인 논리로 정립한다. 아마도 원시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체계적 교리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성령으로 태어난 인간이었는지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왜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이 서로 다른 위격을 가지면서도 하나가 될 수 있는지 삼위일체에 관한 질문을 던질 필요도 없고, 그에 대한 답을 할 필요도 굳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발전하면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로부터 기독교를 지키기 위해서, 또 신학 이론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논리를 발전시켜야 할 필요성이 점차 커졌다. 기독교의 진리를 지적으로 변호하는 변증론(apologetics)이 신학의 주요 분야로 떠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에 플라톤 철학의 옷을 입혔다. 플라톤은 인간은 진리를 보지 못하는 쇠사슬에 묶인 동굴 속의 죄수와 같다고 했다. 지성(nous)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육안의 눈으로만 보는 것은 한갓 그림자에 불과하고, 그 그림자를 만드는 진짜 세계는 우리가 갇힌 동굴 속 너머 저편에 있다고 했다. 플라톤이 말하는 진짜로 실재하는 세계, 곧 이데아의 세계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서 신의 세계가 되었다. 플라톤은 우리가 사는 세계는 현상 세계라고 했다. 우리는 현상 세계에 있는 것들을 감각을 통해서 보고 듣고 만지면서 그것이 진짜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이데아의 모사에 불과한 가짜라고 했다. 정말 실재하는 것, 곧 이데아는 현상 세계에서는 망각되었다고 했다. 플라톤은 몸과 감각에 묶여 망각된 사실을 다시 기억해내는 것을 철학의 사명으로 삼았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와서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은 신의 개념이 되었다. 신은 완전한 실재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곧 플라톤이 말하는 현상 세계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와서는 불완전한 실재가 되었다. 그 사이에 위치한 인간은 한편으로는 영혼을 가진 완전한 실재이면서 동시에 육체를 가진 불완전한 실재가 된다. 플라톤은 참된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이성의 지도를 받은 절제와 조화를 강조했다. 플라톤은 그러한 자기 절제를 통해서 이데아를 기억해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 참된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은 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완전한 실재인 신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를 기억해 낸다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완전한 실재인 신을 기억해내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적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철학이라는 옷을 입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살았던 시대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허용되고, 또 마침내 로마제국의 공식 국교가 되는 시기였다. 제국이 공인한 유일무이한 종교로서 기독교가 가진 당면한 과제는 어떻게 기독교를 로마인에게 이치에 맞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은 이 물음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나라]에서 신을 멀리 하는 나라를 하나의 강도 집단으로 봤다. 그것은 신을 멀리 하려는 인간의 교만의 결과이다. 이러한 교만한 자의 공동체가 아닌, 겸손하게 신의 은총에 의한 구원을 고대하는 공동체가 바로 신의 나라다.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신의 나라는 기독교 공동체 곧 교회를 말한다.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제국이 사라진 이후에도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론체계(교의)를 구축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에 필요한 제도로서의 교회이론을 세운 ‘교회의 아버지’(교부)였다. 그가 세운 이론을 교부철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정재영 / 철학자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2,30대에 언론사 기자를 지냈다. 나이 40에 늦깎이 유학생으로 영국에 건너가 워릭대에서 사회 존재와 인간의 이해에 대한 리얼리즘 접근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기도 양평에 있는 대부산 중턱에 자리를 잡고 철학 저술 작업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 1, 2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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