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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븐 루슈드를 아는가?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라파엘로가 바티칸 궁에 그린 [아테네 학당]에는 터번을 쓴 인물이 등장한다. 이 사람이 바로 이븐 루슈드다. [아테네 학당]에 나오는 유일한 이슬람 학자로, 유럽에서는 아베로에스(Averroes)라는 라틴어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단테가 쓴 [신곡]에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철학자들과 함께 ‘림보’(기독교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이들이 가는 곳)로 간 인물로 나온다. 이슬람 철학자가 왜 로마 바티칸 궁 벽화에 그려졌을까? 그는 아랍어로 기록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라틴어와 히브리어로 번역해서 유럽에 전한 사람이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26년간 이 작업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책에는 간단한 약론에서 자세한 상론까지 세 종류로 나누어 주석을 달았다. 만약 루슈드의 작업이 없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유럽에 알려지지도 않았고, 기독교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옷을 입힌 중세 스콜라 철학이 탄생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스콜라 철학에서는 이름 대신 ‘철학자’라는 보통명사로 통용되는 이가 있다. 이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리킨다. ‘철학자’와 함께 ‘주석자’라는 호칭으로 거명되는 이도 있다. 이 주석자는 루슈드를 지칭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아무리 생각해도 통상적인 표기 방식은 아니다. 처음 ‘철학자’와 ‘주석자’가 중세 유럽에 등장할 때 그들은 모두 이슬람 세계에서 건너 온 수상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철학자가 그 혐의를 벗은 뒤에도 주석자는 철학자를 오독한 인물로 인용되었다. 주석자는 위대한 철학자를 오염시킨 간사한 이교도였을 뿐이었다.

 

나는 이것을 ‘루슈드 두들겨 패기’라고 부르고 싶다. 체제에 위협이 된다고 여겨지는 인물, 또는 사상이 소개될 때 종종 나타나는 양상이다. 위험한 철학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감추다가, 더 이상 덮을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속죄양을 만들어서 두들겨 패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때로는 집단 광기가 동원된다. 한 마디로 마녀 사냥이다. 잠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그토록 위험한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상식을 존중하고 중용의 덕을 유난히 강조한 철학자가 아닌가? 상식과 중용의 철학자로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소개한 이븐 루슈드를 위험한 인물로 두들겨 패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의문은 또 있다. 플라톤과 더불어 서양철학의 전통을 세운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떻게 이븐 루슈드에 의해서 유럽에 전해졌다는 말인가?


이 퍼즐을 풀기 위해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기독교 유럽 세계에서 실전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중세 초기 유럽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논리학에 대한 단편적 기록 이외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가 <철학의 숲> 아우구스티누스 편에서 본 바와 같이 중세 초기의 철학은 기독교에 플라톤 철학을 결합한 교부 철학이 성행했다. 그러면 도대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어디에서 갑자기 나타났다는 말인가? 그것은 이슬람 세계에서 건너왔다. 기독교 유럽에서 실전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이슬람 세계에서 계승 발전되고 있었던 것이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 터번을 쓴 모습으로 그려진루슈드(아베로에스). [아테네 학당]에 등장하는 유일한 이슬람 학자다.

 

 

 

 

14세기 이탈리아 화가가 그린 이븐 루슈드(아베로에스)의 모습


흔히 중세를 암흑 시대라고 부른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물 페트라르카가 처음 쓴 암흑 시대라는 표현은 중세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런가? 로마 제국, 더 정확하게 말하면 로마를 수도로 하는 서로마제국이 무너진 뒤 지중해 세계의 질서는 크게 재편된다. 이슬람 세력은 북부 아프리카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까지 세력을 넓혀나간다. 지금 우리가 유럽이라고 부르는 지역은 이슬람 제국에 의해 포위되어 있는 형국이다. 이 시기를 유럽에서는 암흑 시대라고 부르지만, 이슬람에서는 황금 시대라고 부른다. 물리적인 힘에서도 이슬람이 유럽보다 컸지만, 문화의 힘에서도 이슬람이 유럽을 압도하는 시기였다. 역사가는 이 때를 ‘이슬람의 황금시대’(750~1258)라고 부른다.

 

이븐 루슈드는 1126년 에스파냐 코르도바에서 태어났다. 근대 이전의 대부분 학자처럼 그는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당대 최고의 이슬람 학자들이 그렇듯이 그는 칼리프(이슬람 교단의 최고 지도자) 가족의 건강을 책임지는 궁정의사이기도 했다. 철학과 과학, 그리고 의학 분야에 남긴 그의 업적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근대 의학이 출범한 곳으로 이름이 높은 이탈리아 파도바 대학의 의학부 교수들은 대부분 루슈드의 제자들이다. 기독교 세력에 의해 코르도바에서 쫓겨난 그의 제자들이 무더기로 베네치아 근처에 있는 파도바 대학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의학 분야에 관한 한, 당시 기독교 유럽의 학문 수준은 이슬람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과학 분야에서도 그의 공헌은 크다. 과학사라는 학문을 개척한 20세기 과학사가 조지 사튼에 따르면 이븐 루슈드와 그의 주장을 따르는 아베로이즘(Averroism)은 16세기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철학과 과학이 분리되지 않았던 근대 이전의 시기에 과학의 역사는 곧 철학의 역사이기도 하다. 사튼은 마녀 사냥을 당했던 이슬람 학자 이븐 루슈드의 명예 회복과 역사에서 지워진 아베로이즘 4백 년의 역사를 다시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븐 루슈드가 주창한 학문이 고대 학문에서 근대 학문으로 넘어가는 진정한 이행 과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사튼은 말한다. 이 말에 동의한다. 루슈드가 잃어버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찾아 주었듯이, 우리도 루슈드 철학의 제 자리를 찾아주어야 한다. 

 

철학의 눈으로 본 이븐 루슈드는 이성을 중시한 합리주의자다. 그것은 이슬람 교리에 반대하는 철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한 알 가잘리의 [철학자의 모순]을 재반박한 이븐 루슈드의 [모순의 모순]에서 잘 드러난다. 가잘리와 루슈드가 제기한 물음은 신학과 철학이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이 질문을 살짝 돌려서 말한다면 신앙과 이성은 서로 화합 가능한가 하는 물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잘리가 철학에 대한 신학의 우위, 또는 이성에 대한 신앙의 우위를 주장했다면, 루슈드는 가잘리의 주장에 대한 이의제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신학이란 이슬람 성전인 [쿠란]에 대한 해석과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을 기록한 [순나]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하디스]에서 기초한 이슬람 신학이며, 철학이란 고대 그리스 철학 원전에 대한 번역과 주해를 기초로 하는 철학 연구를 말한다. 루슈드는 이슬람 율법이 철학 연구를 결코 금하지 않으며, 오히려 율법은 논증적 추론을 하는 철학 연구를 명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루슈드는 철학과 신학의 조화를 변호하는 것을 뛰어 넘어서 철학이야말로 진리의 최종 중재자라고까지 주장한다. 신앙에 대한 이성의 우위로 해석될 수 있는 이 주장은 후에 그가 이단으로 단죄되는 하나의 원인이 된다. 그는 율법학자들이 주도하는 철학에 대한 박해가 본격화되었을 때 코르도바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 루세나에 감금되었고 그가 쓴 책들은 불태워졌다. 그의 나이 70이 되는 만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듬해 그는 감금에서 풀려났지만, 모로코에서 생을 마감했다.

블랙 아리스토텔레스. 이슬람 세계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검은 피부를 가진 흑인으로 그려진다.

 

 

 

 

눈을 다시 유럽 세계로 돌리면, 루슈드는 오늘의 서구사상의 전통을 이어준 사람이다. 그는 서구 사상의 큰 흐름을 이루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발굴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중세 유럽에 전달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서구 사상의 큰 특징으로 자리잡은 합리주의 전통을 이어준 인물이다. 그 점에서 기독교 유럽 세계는 루슈드에게 큰 빚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 빚을 갚기는커녕 두들겨 팬 죄가 있다. 유럽의 눈으로 정리한 지적 풍토에서 루슈드는 때로는 이름 없는 적으로, 때로는 기독교 세계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서 침투시킨 ‘사상 전사’ 쯤으로 등장한다. 그러한 흔적은 루슈드를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평가에서 절정을 이룬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베노초 고촐리(Benozzo Gozzoli)가 그린 [아베로에스에 대한 아퀴나스의 승리](부분).

 

 

 

 

정재영 / 철학자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2,30대에 언론사 기자를 지냈다. 나이 40에 늦깎이 유학생으로 영국에 건너가 워릭대에서 사회 존재와 인간의 이해에 대한 리얼리즘 접근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기도 양평에 있는 대부산 중턱에 자리를 잡고 철학 저술 작업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 1, 2권이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고촐리가 그린 그림 [아베로에스에 대한 아퀴나스의 승리]는 스콜라 철학의 왕으로 칭송되는 아퀴나스와 그의 발 밑에 납작 꿇어 엎드린 루슈드를 대조시키고 있다. 과연 루슈드와 아퀴나스는 그런 사이인가? 그들은 이슬람 세계와 기독교 세계를 각각 대표해서 서로 싸운 사이인가? 아니다. 이건 집단 광기가 빚어낸 창작이다. 루슈드는 이슬람 세계에서 박해를 받은 일종의 반체제 인사이며, 아퀴나스는 그 당시 수상쩍게 생각한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그 철학자를 소개한 주석자 루슈드를 적극 받아들여 방대한 신학체계로 녹여낸 인물이다.

 

유럽 출신인 과학사가 조지 사튼은 유럽 세계가 이슬람 세계에게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 심정으로 이슬람 학자들을 만나 역사의 조각을 맞추었다고 한다. 그렇다. 이것이 역사의 제 자리를 찾는 첫 걸음인지도 모른다.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해서 분명하게 밝혀 두자면, 나는 여기에서 이슬람 철학이 기독교 철학보다 낫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 역도 아니다. 소통이 막힐 때 벌어지는 대결구도의 위험성을 고발하는 것이다.


루슈드는 소통의 길을 연 철학자지만, 닫힌 소통 구조에서 큰 피해를 본 철학자였다. 나는 루슈드를 통해 소통 공간이 막힐 때 나타나는 집단 광기를 읽는다. 루슈드가 아닌 아베로에스는 기독교 유럽을 위협하는 인물의 이름이었고, 아베로에스가 아닌 루슈드는 이슬람을 흔드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불행하게도 그는 이슬람 세계에서도 결코 환영받는 인물이 아니었다. 역사의 아이러니지만, 그의 철학은 이슬람 세계가 아닌 기독교 세계에 오히려 더 큰 영향을 끼쳤다. 과연 그는 어떤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되기를 원할까? 이슬람의 이븐 루슈드일까, 아니면 유럽의 아베로에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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